퇴근 후 싱크대에 서서 고무장갑을 끼고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옆집인데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달칵 열었더니 "전에 말했던 김치..."하고 옆집 총각이 반바지 차림으로 문 앞에 서있었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던 김치가 아직까지 유효했다니. 김치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나눠주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통이 얼마 정도면 되는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가 잠깐 따라와 보라고 해서 시뻘건 양념이 묻은 고무장갑을 그대로 끼고 옆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는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의 양을 가늠하더니 이 정도 통이면 되지 않겠냐는 말을 하며 찬장을 열어보였고, 그 순간 찬장 문을 기어 다니는 작은 바퀴벌레가 보였다. 앗 하고 놀랐지만 너무 놀라면 상대방이 민망할 것 같아 통을 찾아보겠다고 하고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3주쯤 전인가. 무슨 일로 집에서 울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밤 열한 시가 넘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옆집인데요, 하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눈물범벅인 내 얼굴을 보고 그가 놀라서 "엄마가 김치를 보내주셨는데...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이 상황이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네, 네, 다음에, 다음에요. 고맙습니다"하고 서둘러 문을 닫은 기억이 있다. "도움 필요하면 말해요"하는 그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그 뒤로 한 번인가 출근하다 마주쳐서 서로 꾸벅 인사를 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자연히 김치는 없던 얘기가 된 것으로 알았는데 다시 한번 주겠다고 하니 받지 않을 도리가 있나. 적당한 통을 찾아 다시 옆집 문을 두드렸다. 멀거니 서서 나에게 통을 받아 들고 김치를 한 포기 두 포기 꾹꾹 눌러 담는 손을 멀뚱멀뚱 지켜보았다. 김치를 통에 옮겨 담으면서 그가 물었다. 회사는 잘 다녀요? 뭐 힘들면 그만둔다 싶다가도 다음날이면 또 출근하고 그렇죠 다 똑같이 살죠 하하. 전에 울고 있길래. 회사 때문에 힘들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랬구나. 네 그랬어요. 감히 내 상황에 누구의 생활공간을 이러네 저러네 평가하는 것이 마땅치 않지만, 전에 한번 들렀을 때보다 집이 한층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비닐봉지, 한쪽 구석에 수북한 맥주캔, 건너편 상위에 또 수북이 쌓여있는 맥주캔 더미와 과자 봉지, 싱크대에 가득 쌓여있는 설거지...
나 역시 이 사람에게 마찬가지 인상일 것이다. 정리안 된 택배 상자와 스티로폼 상자는 일주일이 넘도록 현관 앞에 뒹굴고 있지, 혼자 사는 사람이니 김치 좀 나눠줄까 싶어서 노크했더니 울고 있지, 울고 있는 여자 뒷배경으로 양말이며 수건 따위가 마른미역처럼 건조대에 널려있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 엉망진창이고 약해빠진 나의 모습을 아무한테 들켰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날것의 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도 별달리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기색이 없을 수 있는 것은 상대에게 기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여자 친구가 놀러 오는 날이면 정신없이 쓸고 닦고 할 것이다. 김치통을 들고 나서며 집에 드릴 게 없는데 뭐가 필요하신지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더니 그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뭘 바랬으면 애당초 나눠준다는 말을 안 했을 거예요. 달칵하고 문이 닫혔다.
그래도 기대를 해요
집으로 모세 씨를 불러들여 소라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나나의 세계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모세 씨와 만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나의 내면에서 그 부분은 잠잠한 듯 보여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곳. 가장 민감한 비늘이 돋은 곳.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기대는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것. 숨기고 싶은 것을 영원히 숨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도 기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항상 번듯하고 매끄러운 면만 보이길 바라는 것도 기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실은 말도 안 되는 초코파이 씨엠송처럼 말하지 않아도 나의 민감한 마음의 변화를 상대가 낱낱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기대. 반대로 말하면서도 상대방이 다시 그 말을 반대로 들어서 결국에는 옳게 알아듣기를 바라는 것도 기대. 그러니까 기대라는 것은 와장창 부서지기 마련인 것. 기대를 하지 않으면 바라고 기다릴 것도 없겠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특히 기대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리하기 시작하면 좀 곤란해진다. 이 사람이 저렇게 해줬으면, 이 사람이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번번이 부서지면 마침내 그 사람이 미워지고 마니까.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동생에게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그러니까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상처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 말에, 작은 행동에 너의 온 마음이 다 무너져 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 상처 받을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너의 가장 연약한 세계를 아프게 찌를 거라고.
섭섭하던 참이었다. 바늘처럼 작은데 바늘처럼 따끔해서 말을 하자니 민망하고 참고 있자니 따가웠다. 한 발짝 떨어져서 봤을 땐 꽤나 멀쩡한 것 같은 나의 세계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이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다. 나는 상처 받을 준비가 됐나.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가, 웃어넘길 수도 있는 작은 행동이 나의 가장 연한 부분을 부숴버린다 해도 받아들일 각오가 됐나.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벌건 양념을 묻혀가며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이 이토록 축축하고 섭섭한 것은 나의 기대 때문이고 기대는 으레 부서지기 마련이니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 하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두 사람 사이에 기대랄 것이 하나도 없는 옆집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김치를 주겠다고 해서 산뜻한 마음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도 고무장갑을 낀 차림도 눈물이 번진 눈가도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는, 내가 김치를 사양한다 해도 신경을 안 쓰고 김치를 덥석 받는다 해도 그걸로 끝일, 좋아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는 관계는 얼마나 담백한지.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김치통을 내려놓고는 멀금멀금 바라보았다. 기대 없는 사이는 얼마나 맑고 좋아, 감탄을 하면서.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는 칼로 탁 자르듯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고 끈적끈적하고 뜨듯해서 도무지 잘 떨어지지를 않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그건 기대 때문이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대가 없으면 도무지 둘 사이를 끈끈하게 맺어줄 무엇이 없으니,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을 내 곁에 붙들어놓으려면 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대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오지 않은 먼 일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그 미래에 당신이 있으면 좋으니까. 다른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래. 오지 않은 먼 일을 미리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었으면 바라는 그 마음은 나를 조금 환하고 기쁘게 만들어버린다. 다가올 주말에 친구를 만나는 일, 삼 년 뒤의 2월 29일에 파티를 하는 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결국엔 나의 소설을 완성하는 일. 생각만 해도 좋은 일들.
그러니 기대를 하면서 살아야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대를 끼워놓고는 때로 부서진 파편이 나의 가장 약한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내 마음을 환하게 다 열어둘 사람이 한 사람은 있어야지 생각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