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달력의 숫자가 새빨갛게 물든 날이면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온다. 이 '특별한'날을 어떻게 보내야하나. 어떻게 보내야 빨강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걸까. 이 빨강이 저마다의 가슴 속을 파고 들어가 엇비슷한 무게로 작용하는지, 빨강을 들여다보다 문득 묵직해진 마음의 무게에 화들짝 놀란 이들이 연락을 해온다.
너 크리스마스에 뭐하니?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속있어?
어제 아침 묵묵히 세수를 하면서 '모든 크리스마스가 근사할 필요는 없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보통의 날들. 여느 보통의 날들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추운 보통의 어느날. 물방울이 묵묵히 얼굴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어쩌면 좀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예쁜 옷을 입고 출근하였고 사표가 필요없는 퇴사를 했다. 그러고보면 크리스마스를 딱히, 특별히 근사하게 보낸 적도 없다. '크리스마스'라는 키워드를 찍어넣으면 곧바로 내 머리에서 그려내는 근사한 몇장의 추억이 있지만 멋지고 아름다운 것은 저만치 밀어두고 '크리스마스를 딱히, 특별히 근사하게 보낸 적도 없다'라는 문장에 '그렇다'라고 혼자서 열심히 끄덕였다. 그렇다. 그래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크리스마스의 새빨강이 사치일만큼 고되고 피로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새빨강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니까.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여기도 저기도. 예쁘게 포장한 장미 한송이의 손을 잡고 수줍게 연인을 기다리는 소년도 보이고, 달뜬 얼굴로 서로의 품을 포개는 연인들도 보인다. 나는 코트 안에 감춰진 아름다운 옷을 짐짓 모른 척하며 옷자락을 단단히 여미고는 '크리스마스를 딱히, 특별히 근사하게 보낸 적도 없다'라는 문장을 계속해 곱씹었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이름모를 누군가의 불쾌한 숨결을 마주하면서, 거리 이곳저곳을 꾸역꾸역 걸으면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어찌 좀 잘 보내고 있느냐는 누군가의 메시지에 그렇다고 대충 답장을 하면서 곧 다가올 빨강을 실컷,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 낭비해버려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몇시간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싶다는 친구의 말이 점점 커지는 바람에 이런저런 가게를 들어가 이런저런 것들을 집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속에서, 나는 그만 크리스마스에 심취했다. 크리스마스의 '특별함'을 나도 모르게 인정해버렸다. 아름다운 남색 목도리를 내게 선물로 사줬다. 이런저런 발걸음 끝에 친구의 선물도 골랐다.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줄 선물과 카드를 단정하게 포개고는 저절로 내 머리맡에 놓았다. 아주 어린 날의 크리스마스 아침, 들뜨고 달뜬 마음에, 혹시나 두려운 마음에 차마 눈을 번쩍 뜨지 못하고 꼭 감은 눈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어 머리맡을 만졌을 때 바스락거리던 포장지의 소리와 맨질한 감촉이 떠올라 웃었다.
자,
오늘은 새빨간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딱히, 특별히 근사하게 보낸 적도 없다'라는 문장은 저만치 밀어두고 있는 힘껏 즐겁게 보내자. 그냥 보통의 날들. 여느 보통의 날들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추운 보통의 어느날이지만, 이날을 위해 탄생한 온갖 아름다운 노래와 근사한 케이크와 펼치면 소리가 나는 카드를 모른척 할 수만은 없을테니까. 오늘처럼 반짝이는 알전구와 머그컵에 담긴 따듯한 차한잔과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더없이 어울리는 날도 드물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수많은 보통의 날들중에 오늘만을 특별히 잘 기억하게 될테니까.
그대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