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를 기어들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고 사이의 어느 즈음에 어느 책에서 읽은 농이 하나 있다.
'하루에 딱 두 번 맞는 시계가 있고, 한 번도 맞지 않는 시계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시계를 사겠습니까?'
오늘은 하루종일 대청소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찬장을 와 엎어놓고는 에라 모르겠다, 잠을 좀 자다가 배가 고파져 일어나 뭔가를 겨우 챙겨먹고는 또 신발장을 와 엎었다가 순식간에 더러워진 방의 몰골을 보고는 이맛살을 딱 찌푸리며 다시 에라 모르겠다, 가 되어 잠을 좀 자다가 다시 또 일어나 어딘가를 와 엎어놓는 식이다. 하루종일 이 짓을 반복했다. 집 구석구석에 숨어 몰래 공간만 차지하던 박스며 비닐 따위를 이만큼이나 끄집어냈고, 곰팡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자가증식하는 빨래를 왕왕 더 무서운 기세로 돌렸으며, 쓰레기 봉투도 꽉꽉 채워 모든 것을 내다버릴 요량으로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집에서 한발짝을 나왔다. 어 추워. 높지않은 빌라이지만 쓰레기의 양이 많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유독 벽면에 부착된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동파의 위험이 있습니다. 수도꼭지는... 보일러 온도는...' 어쩌구저쩌구. 이 건물에 이사온 것이 지난 여름이었으니, 여름내내 봐오던 글귀였는데 드디어 글귀가 계절의 아귀와 맞아떨어지면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1년 내내 붙어있지만 겨울이 되어야만 비로소 맞아 떨어지는 글귀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오래 전의 그 농이 생각 난 것이다. 나는 당연히 두 번이라도 맞는 시계를 골랐지만, 정답은 '한 번도 맞지 않는 시계'다. 두 번이라도 맞는 시계는 정지된 시계이고 한 번도 맞지 않는 시계는 꾸역꾸역 미세한 오차를 보이며, 어쨌든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시계란 말씀.
오늘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대청소하는 꼭 같은 양으로 책을 읽었다. 책장을 끝에서부터 슬금슬금 파먹어 놓고는 에라 모르겠다, 잠을 좀 자다가 일어나 또 가운데를 뒤적뒤적 하다가 어딘가를 와 엎어놓는 식이다. 어쨌든 대청소를 마쳤으니 책도 다 읽은 셈이 되었다.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다 읽고 나서 '사랑에 관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책' 이라고 짧은 감상을 적어두었다. 지금은 조금 수정하고 싶다. '사랑에 관한 거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책'.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엇갈림이잖아, 석원아. 인생이란 게 그렇잖아." (p.349)
째깍째깍 엇갈림. 열심히 엇갈림. 줄곧 엇갈림. 평생 엇갈림.
그러니까 사랑은 어쩌면 시계 같은 거겠지? 다들 한 번이라도 맞는 시계가 옳다고, 의심없이 시계를 고르지만 사실 그 시계는 영원히 가지 않는 시계였다는 걸 알아버리는게 사랑이겠지. 상대방은 움직이지 않는데 나만 하염없이 째깍째깍 하루를 돌다가, 딱 두 번 맞아떨어지면 박수를 치며 뛸듯이 기뻐하는게 사랑이겠지. 그 사람과 나는 도통, 도무지 한 번을 맞질 않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동안 그 열심한 불평이 끝내 사랑임을 알아채는 것이, 혹은 기어이 모른척 하는 것이 사랑이겠지.
지겹고 신물나고 의미없음이 반복되는 와중에, 문득 겨울이 와서 수도꼭지와 보일러를 당부하는 메세지가 나에게 꼭 맞는 아귀가 되는 것이
그것이 사랑이겠지.
문득 당신이 와서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나에게 꼭 맞는 아귀가 되는 것. 평생에 딱 한 번이라고 해도, 한 번이라도 맞는 당신이 옳다고 바보짓인줄 알면서 아무런 의심없이 당신을 덥석 품는
그것이 사랑, 나의 사랑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