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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니킴 Dec 24. 2021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커리어가 없다는 말

연말에 친하게 지내는 지인(?)보단 친구에 가까운 사람들과 강남역 근처 이자카야에 모였다. 


우리는 2019년에 같은 공간에 모여 각자 다른 일을 했다. 

나는 큰 회사 안에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팀에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때 나의 팀이 투자했던 스타트업의 창업 멤버들이었다. 


2021년의 끝자락, 우리 셋은 모두 그 때 속해있던 조직에서 한번 이상의 이적을 했고, 각자 하는 일이 다른 건 여전하다. 모여있는 카톡 단톡방의 이름 또한 ‘탈출방’. 각자 당시 자신이 속해있던 조직에서 탈출을 해야만 했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송년회였다.  


간단하게 시작하는 술과 각자 먹을 저녁 메뉴를 고르고 난 뒤, 우리는 그간 못 본 기간 동안 생긴 에피소드 꾸러미를 하나씩 끌렀다. 은근하게 죽이 맞는 사람들이라 이야기의 흐름이 끊길 때즈음 다시 물꼬가 터졌고, 조용해졌을 땐 다른 메뉴를 시키면서 대화와 음식은 끊기지 않았다. 일 얘기는 자연스레 커리어 얘기로 흘렀고, 스타트업에서 일을 했던, 그리고 아직도 연관된 일을 하고 있는 두 친구가 자신들은 ‘커리어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의아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할 때 두 친구가 어떻게 문제 상황을 타파하면서, 회사를 앞으로 이끌었는지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둘 다 개발을 할 줄 알고, 지금은 실무에서 손을 놓았더라도 코드를 훑으면 어떤 기능을 하겠거니 파악할 줄 알았다. 어디에서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물론 농담조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타트업에서 일을 해서 커리어가 없다고’ 말을 하다니. 


그러는 동시에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을 해서’라는 전제는 이해했다. 


평균적으로 스타트업이 잘될 수 있는 확률은 10% 이하다. ‘잘 된다’는 기준은 모호하지만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급으로 잘 된다’고 가정하면 잘 될 확률은 고작 1-2%다. 1-2%의 회사가 유니콘으로 성장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7년. 두 친구가 이전에 몸담은 스타트업에서 7년 동안 버티더라도 그 회사가 기업가치 1조를 넘길 수 있는 확률은 고작 2%. 물론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스타트업에서 일해서 커리어가 없다’는 친구들의 말엔 깔깔 웃으며 맥주잔을 부딪혔지만, 자신의 시간과 애정을 쏟아붓고, 회사 잘 되라고 온갖 잡다한 일과 궂은 일도 다 했는데 결국엔 그곳을 나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모종의 씁쓸함이 담긴 말일 거라 짐작한다. 


회사를 몇번 다녀본 우리는 이제 안다. 


자신이 시작한 사업이나 개발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하면 그 내용은 이력서에 적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내가 일한 스타트업이 2% 유니콘이 아니라 98%에 들어가면 ‘커리어가 쌓이지 않았다’고 봐야할까? 그렇다면 잘 쌓은 커리어란 뭘까? 직장인이 된 시점부터 막연하게 품은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1. 네임밸류가 높은 회사에서 일하면 좋은 커리어인가? 

2. 특정 직무에 대한 근속 연수가 많아지면 좋은 커리어인가? 


우선 커리어는 특정 도메인에 속한 회사의 특정 직무에 취업한 시점부터 시작한다고 정의하자. 


네이버, 카카오, 신세계, 현대기아차 등은 굴지의 대기업이고 각각 IT, 유통, 제조업 도메인에 속해있다. 회사 네임밸류가 좋은 건 물론 백익무해하지만 이런 회사에 첫 입사하는 건 커리어의 시작일뿐 바로 ‘좋은 커리어’라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좋아지는 건’ 내 직무에서 퍼포먼스를 내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어떤 태스크에 착수하여 이를 완결짓고, 결과적으로 회사에 사업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었을 때 우리는 퍼포먼스를 낸다고 한다. 그러니까 네이버나 현대기아차와 같은 대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더라도 단순 반복적인 직무 수행을 하고 있다면 저절로 좋은 커리어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면 직업인으로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특정 직무를 오랜 기간 수행 중이라면 좋은 커리어인가? 비교적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나의 직무를 3년 넘게 하다보면 맡은 태스크의 범위가 넓어지고 중요도도 높아질 수 있다. 그 시간만큼 일을 하면 그런 기회는 찾아온다. 반대로 스타트업처럼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직무가 자주 바뀌는 경우는 어떻게 봐야할까? 3년 동안 운영 업무를 하면서 마케팅도 하고 고객지원도 한 사람의 커리어는 좋은 커리어인가? 






스타트업에서의 커리어는 회사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즉, 회사가 떡상하면 내 커리어도 떡상한다. 오늘의집이나 당근마켓이 처음 시작할 무렵부터 함께해 지금까지 그 회사에서 운영이든, 마케팅이든, 고객지원 담당자로 종횡무진 커리어를 쌓았더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회사의 퍼포먼스를 함께 만들어 낸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회사가 떡상하는 시점에 내가 합류하는 천운이 따라주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가 일정 궤도에 오르기 전에 힘들어서 퇴사하거나, 회사가 망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평균 근속 연수가 2년이 채 안되고, 유니콘으로 거듭나는 회사가 2% 밖에 되지 않는다면 다시 질문의 원점으로 돌아가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커리어가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걸까? ‘좋은 커리어’를 구성하는 데에 직무적인 퍼포먼스, 성장하는 회사에서 함께 성장하는 운이 따라주는 경험 외 또 다른 축으로 볼 수는 없을까? 


내가 찾아낸 답은 결국 일에 대한 야망이다. 


회사 도메인이 달라져도, 직무가 바껴도 내가 이 일을 통해 어떤 걸 이루고자 하는지,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에 대한 건강한 욕망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의 이력서는 자신의 비전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나중에 커서 뭐하고 싶어?’ 이 질문을 어른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일을 하는 것에서 나아가 커리어를 통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일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갈 때, 그러한 순간의 노력들이 좋은 커리어를 만든다고 믿는다. 


함께 맥주잔을 부딪힌 나의 친구들은 일에 대한 야망을 가진 친구들이라 생각한다. 


성인이 된 모두가 어느 시점엔 일을 시작하지만, 일을 시작한 모두가 일에 대해 어떤 야망을 갖지는 않는다.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과 직무가 자주 바뀔지언정, 몰아치는 일에 ‘나는 지금 뭘하고 있나’ 현타가 오더라도 커리어가 안 쌓이는 건 아닐지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있어야하니까. 


영국인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역사란 모든 일이 다 지난 다음에야 명료해진다. 나를 포함해 모두의 경력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의 기사를 마지막으로 인용하자면 "리처드 로저스는 여든여덟 해의 삶이 다 지난 지금, 건축계는 그를 주저 없이 전설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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