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넛 버터와 오후의 코끼리
전화기가 그렇고, 스테레오 오디오가 그렇고, 컴퓨터와 TV가 그렇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불편함이 없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기에 불편함 또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불편함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의존적으로 변화되고, 결국 이들 없이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그랬다. 어느 순간 나타나 우리의 삶에 깊게 침투하더니, 이제 그들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은 왜소했지만, 강인했고, 느리지만, 현명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갔고, 그들의 지혜를 나눠줬으며, 문화를 공유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세대가 지나고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 버리듯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그들이 남긴 한 뼘 크기의 석판만이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인류는 당황했다. 그들의 부재는 발전의 부재를 의미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그들에 의해 이뤄낸 기술적이고 사회 구조적인 많은 문명의 이기들의 발전이 멈춰버렸다. 인류는 그들이 남긴 석판에서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석판에는 무엇인가 새겨져 있었다. 많은 학자가 해석하려 달려들었지만,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림 같기도 하고 문자 같기도 했다. 유일하게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석판에 새겨진 550이라는 숫자였다. 50년간 우리가 알아낸 것은 아라비아 숫자만이 우주에 통용되는 공용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석판 연구는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연구소에는 석판 해석을 중단하고 이를 외계 박물관에 전시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연구 예산은 더 이상 지원되지 않았고, 프로젝트팀의 공식 해체도 선언됐다. 그때였다. 뉴스를 통해 외계 언어를 번역했다는 사내가 나타났다. 바로 서울 동작구에 사는 김철구였다.
그는 자신을 외계 언어 전문 번역가라 말했고, 자신이 번역한 외계 문학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외계 문화진흥청에 긴급 공문을 보냈고, 그를 만나기 위해 황급히 한국으로 날아갔다. 우리는 한국 정부에 사안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했고, 이를 인지한 한국 정부는 해외 언론들을 제치고, 김철구와 단독 인터뷰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미스터 킴철구, 외계 석판의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시는가요?”
내가 말했다.
“석판이요? 외계에서 석판에 무언가를 새겼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데….”
강철구가 말했다. 그는 석판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외계에서 석판은 정보의 영구 기록 목적도 있고,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담았다는 상징적인 매체로 사용되는 것이오. 아마 이 석판에는 인류 전체에게 보내는 어떤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을 것이오. 아쉽지만 여기 적힌 말들은 나도 일단 연구를 해봐야 하오. 이 언어는 칸타쿰타 행성의 방언이오. 아주 중요한 정보를 기록할 때 보안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지.”
강철구가 말했다.
“그럼, 해석하는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비록 칸타쿰타 방언이라도, 나는 표준 외계어 2급 보유자. 한 달이면 충분할 거요. 허허허.”
강철구는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우리는 뭔가 의심쩍었지만, 현재로서는 강철구밖에는 대안이 없었다.
“인류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달 후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해석을 부탁하고, 그렇게 발길을 돌렸다.
한 달이 못 되어 한국 정부의 연락을 받았다. 김철구가 석판의 의미를 해석했으며, 이를 전 세계 생방송으로 공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급히 TV를 틀었다. 옅은 감색 슈트를 입은 김철구가 카메라 앞에 섰다.
“외계인이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강철구는 손으로 입을 막고 헛기침을 한 뒤 넥타이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TV 화면 너머로 긴장한 그의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우리는 그의 입을 주시했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맛있는 물의 양은 550mL다.”
강철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