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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야간숙소 Aug 28. 2021

유럽 역사를 규정하는 키워드 : 중심 이동

유럽 헤게모니의 변화

1. 서론 : 중심 이동


유럽 역사를 규정한다는 것은 타 지역의 역사와 구분되는 고유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유럽은 자본주의적 성장을 통해 얻게 된 힘으로 근대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타 지역에는 없는 유럽‘만’의 역사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유럽의 내재적 발전과 힘만으로 형성된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세 말 이탈리아 도시에서부터 이루어지던 유럽 초기 자본주의의 원거리 교역은 11-12세기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흔히 대항해시대라 불리는 15-16세기의 원거리 교역은 인도양에 이미 존재하던 아시아 내의 교역에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아메리카에서의 금과 은의 약탈과 아프리카의 흑인 노동력의 유출이 없었다면 유럽의 자본주의적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이 명백하다. 결국 자본주의는 유럽의 독자적 산물이 아니며 위계화 된 세계 질서 속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흥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지역의 역사를 규정하든 ‘자본주의’는 중요한 키워드로서 다루어져야 하며 착취와 위계화를 낳은 유럽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형성으로서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유럽 역사를 자본주의와 관계를 지을 때는, 자본주의 일반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유럽‘만’의 특성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이에 본인은 유럽 역사를 ‘중심 이동’으로 규정짓고자 한다. 동아시아사를 볼 때 왕조의 변동은 있을지언정 동아시아의 중심지가 ‘중국’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다. 제국주의 시기 잠깐 일본으로 중심이 넘어간 적은 있지만 그 이전 오랜 기간 중국은 아시아의 중심이었다. 중국 내부만 보더라도 이민족이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수도가 남쪽으로 이동되었던 사례와 명나라 시기 만주족과 몽골에 대한 대비로서 수도를 북쪽으로 옮긴 것 외에는 ‘중심’ 자체가 변한 적은 없다. 강남지역이 개발되면서 경제적인 발전이 북쪽을 앞지르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중심이 강남으로 이동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럽은 자본주의와 연관 지어 볼 때, 몇 번의 중심 이동이 있었으며 이는 곧 유럽‘만’의 특성을 지니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든 ‘독자적’인 요소가 되었다.


직관적으로 유럽의 역사를 훑어보아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 대항해시대 이후 대서양 연안 국가들로 중심이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듯 유럽의 패권을 지고 세계로 뻗어 갔던 네덜란드와 영국은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다. 절대주의 시기 프랑스의 정치적, 군사적 힘과 나폴레옹 시기의 대륙 패권 장악은 근본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근본적인 무게 중심은 프랑스에 있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연관 지어 볼 때, 유럽 역사의 중심 이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서 네덜란드,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몇 번의 중심을 중간에 끼어 넣을 수는 있으나 큰 틀은 변하지 않는다.


페르낭 브로델의 경우 베네치아, 안트워프, 제노바, 암스테르담, 영국으로 설명하며 조반니 아리기의 경우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으로 설명한다.



유럽 역사에서 중심 이동은 ‘우연’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저울추가 기울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심은 중심이 되었던 이유가 있었으며 다시 다른 중심에 중심을 내어준 이유가 있었다. 이는 대부분 자본주의의 성격과 연결되며 유럽이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힘’과 연관된다.


     


2. 16세기까지 : 양극성 → 이탈리아 북부 도시 국가


유럽은 중세 봉건제 성립 이후 11-12세기 팽창하기 시작했다. 외부적으로는 십자군 운동과 레콘키스타 운동을 통해 지중해 교역을 장악했으며 내부적으로는 농업기술상의 진보를 통해 생산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인구도 증가했다.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내외부적 요소를 토대로 했다. 곡물 생산의 증가와 인구의 증가, 도시의 발전은 서로 간의 확실한 상관관계를 지니며 11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유럽 팽창의 토대가 되었다.


이 기간 유럽의 성장은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중심을 형성시켰는데 지중해 항로를 중심으로 한 남부와 산업 발달을 토대로 한 북부,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중간 지점에 정기시가 형성되면서 ‘다극’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북부의 경우 직물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했고, 8-9세기 바이킹의 원정으로부터 기반이 된 해상로들을 통해 한자동맹을 통해 북유럽 차원의 교역 관계를 형성했다. 남부의 경우 이슬람 도시들과 이탈리아, 서유럽을 매개하는 중간지로서 역할을 하다가 십자군을 통해 오리엔트 교역로가 뚫리면서 상업적 성장을 가속화했다. 북부의 공산품과 오리엔트로부터 구한 남부의 향신료는 해상로와 육로를 통해 교환되고 두 지역의 교역을 정기시가 매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탈리아에서 자체적인 산업 중심지가 발달하면서 북부와의 교역의 필요성이 줄었고, 14세기 경기후퇴로 수익성이 높은 지중해에 유럽 전체가 의존하게 되면서 유럽의 남부가 우위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간 지역의 정기시는 몰락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유럽 남부, 즉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의 우위는 독일 및 중유럽의 은을 토대로 오리엔트 지역과 지중해를 통해 무역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정교한 상업망, 복식부기, 해외보험 등 자본주의적 기술 및 기획들이 만들어지거나 활용되었으며 대표적으로는 베네치아가 해군을 육성해 자체 무장력을 강화해 경쟁국가를 무역에서 배제하며 우위를 차지했다. 오리엔트와의 무역에 있어서 모든 상품 수출은 반드시 베네치아 항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하기도 했다.


14세기 말 베네치아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은 압도적 ‘예산’의 존재인데 영토국가 예산에 비해 이 도시국가가 훨씬 우월하며 당시 유럽 국가들 중 1등이었다.


이탈리아의 우위는 15-16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는데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 그리고 대서양 발견과 동인도 교역로의 발견으로 중심축이 점차 북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로부터 거대한 은을 획득한 스페인의 재정을 떠안아 자본주의적 기술을 토대로 전 유럽의 지불과 결제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제노바는 기존 이탈리아 북부의 국지적 유통 영역을 벗어나 유럽 전역의 규모에서 이윤 획득을 도모하며 중심 이동을 늦추기도 했다.


     


3. 17-18세기 : 네덜란드


16세기가 지나면서 유럽의 중심은 완전히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프랑스, 영국 등 영토 국가의 발전으로 대서양의 교역로들을 통해 들어온 상품들은 주로 북쪽에서 소비되었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이어 중심이 된 네덜란드는 유럽 전역의 상업을 집중적으로 중개하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유럽의 주요한 교역은 당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을 만큼 네덜란드는 중개무역항 기능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원거리 무역을 주도한 동인도회사, 동인도회사의 교역을 보위하는 해군력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다. 동인도회사는 국가독점적 형태로 형성되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었고, 해군력이 우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네덜란드의 선단이 유럽 국가 전체의 선단을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으며 조선 기술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6-17세기 종교개혁으로 이후 지속된 갈등으로 전쟁을 피해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로 이전했는데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이민 온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대표적이다. 이 유이민들 중 상당수가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상인들이었고 이는 네덜란드의 상업 발달에 큰 보탬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인도-중국-일본을 연결하는 복합적 주요교역의 관절이라 할 수 있는 말레이군도를 지배하고 감시하면서 아시아의 교역을 장악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네덜란드의 독특한 특징이었는데 거래를 위해 항구만 점령하고 내륙으로 들어가지 않고, 군대도 그 정도 수준만 유지했다. 즉, 생산에 대한 통제 없이 혹은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식민화 없이 유통부문을 주도하고 있으면서도 영토병합의 부담이 없어 상당히 유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약점으로도 작용했는데 생산물을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고 해외에서의 우위가 쇠퇴하면 네덜란드의 우위 또한 자연히 약해졌던 것이다. 과정에서 감시 업무와 식민지 쟁탈에 대한 경쟁으로 인해 많은 비용이 들었고, 결국 네덜란드는 후발국가들이 네덜란드를 모방하여 원거리 무역 독점을 본떠서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해군력을 키우고 경쟁하는 가운데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4. 18-19세기 :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유럽의 중심이 된 영국은 동인도회사와 해군력 강화 뿐 아니라 네덜란드와는 다른 새로운 특징을 지녔는데 이는 국내적 생산구조와 전국적 시장구조라는 국민경제의 형성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 생산 통제이다. 이 둘은 연관관계를 가지는데 항구만을 점령하여 유통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직접적 영토 장악이 가능하려면 그만한 국가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상주의가 작용했는데 보호무역조치로 국내 생산을 보호하고 중앙집중적인 국내 시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또한 같은 방향에서 중상주의적 정책을 수행하며 강대국으로 발돋움했으나 자신의 거대성으로 인해 영국과 같이 완벽하게 응집된 국내 생산구조와 시장구조를 갖추지 못함으로써 중심을 차지 못하게 되고 플라시 전투 패배로 상징되듯 영국에게 그 중심을 내주게 된다.


결국 영국의 해외팽창은 네덜란드의 경우와 달리 영토팽창을 의미하게 되는데 영국은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아는,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한 원료 공급지로서의 식민지, 국내 생산,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으로서의 식민지라는 ‘제국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로부터 비롯된 18세기는 영국의 ‘상업적 우위’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18세기 말-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인해 ‘산업적 우위’까지 가져가게 되며 영국은 완벽하게 중심이 된다. ‘산업혁명’으로 국내 생산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대되면서 다시 수요를 증대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전지구적 팽창이 요구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에 맞게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후발국가들이 네덜란드를 모방, 경쟁을 통해 네덜란드의 우위가 약화되었듯이 영국 또한 마찬가지로 후발주자들이 영국을 모방하면서 경합을 벌이면서 그 우위는 점차 약화되고 열강들의 각축전이 진행되게 된다. 이후 중심은 독일과 미국의 경합이었으며 현재의 세계의 중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국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 넘어간다.


     


5. 유럽 역사에서 중심 이동의 의미


이상의 내용을 개괄하면, 초기 유럽은 북부와 남부라는 양극성을 토대로 중심이 다극적인 성격을 띠었으나 지중해 무역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 즉, 남부로 이전되었다가 지리상의 발견 이후 북부로 이전되었으며 다시는 남부로 내려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북부에서의 중심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전되었다. 이탈리아의 국지적 유통, 네덜란드의 유통구조 장악, 영국의 생산에 대한 직접 통제는 분명히 이전의 중심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각각의 중심은 중심이 되었던 이유가 존재했다. 중심이 아니게 된 이유 또한 그와 연관되었다. 그렇다면 유럽 역사에서 이와 같은 중심 이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체제론을 주장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경우 ‘중심’이란, 어떤 특정 국가가 다른 국가에 비해 생산, 무역, 금융, 군사력에서 상대적으로 더 효율적인 상태라고 정의했다. 헤게모니 순환론을 주장한 조반니 아리기의 경우 ‘중심(헤게모니)’이란 중심의 이익이 전체 국가의 보편적 이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상태이면서 자신이 가는 발전의 길로 다른 나라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이 두 정의를 종합할 수 있다고 본다면, 본인의 관점에서는 결국 유럽 역사에서 ‘중심 이동’이란, ‘체제 혁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이전과 일정 정도 ‘단절’된 ‘더 나은’ ‘발전’과 그것들의 ‘경쟁’을 통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유럽 역사의 ‘중심 이동’은 체제 간의 급격한 ‘단절’없이 조금씩 성장해 나간 아시아의 성장과 구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주변 지역들과의 관계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소위 ‘체제 경쟁’이라고 부를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던 중국은 19세기 이전까지는 유럽에 확실한 우위를 내주지 않았으나


이와 관련해서는 논쟁이 많은 것으로 안다. 다만, 논쟁을 봤을 때 14-15세기는 적어도 아시아가 유럽에 비해 선진적이었고, 19세기부터는 유럽이 우위에 있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반면 16-18세기는 우열에 관한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이 표현했다.



점차 비유럽 세계를 통합해 간 유럽에 우위를 내주게 되었다. 유럽의 전 세계에 대한 지배는 타 지역에 대한 착취와 위계화로서 가능했지만 유럽의 ‘독자적’인 요소로서 중심 이동이라는 ‘체제 혁신’을 통해서도 가능했다.


사실 유럽 역사 속에서 ‘중심 이동’은 상당 부분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방식이기도 하다. 월러스틴과 같이 16세기부터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보거나 舊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이 19세기부터 ‘진정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보든 간에 유럽 역사의 ‘중심 이동’은 어느 정도 자본주의의 동역학과도 관련된다.  따라서 유럽 역사를 중심 이동으로 규정하고 유럽사를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일정 정도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연구하는 것이며 현재 불균형한 세계 체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연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라 불리는 지금 시기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단초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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