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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은벼 Nov 02. 2024

구멍 난 아이의 세상

누가 아이를 겨누었나?

 ‘삐삐삐 삑, 열렸습니다.'


고요한 밤을 깨우는 도어록 전동음과 함께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이어폰 너머로 익숙한 노래가 아득히 들려오고, 뽀얗게 김이 서린 안경 저편으로 아이의 지친 눈빛이 보인다. 

불투명하던 안경이 점점 속을 드러내는 순간 아이의 텅 빈 눈동자가 비친다.


시계는 10시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 눈을 무시한 채 가방을 들어주며 아이를 재촉한다.


“들어가서 씻고, 책 읽고 자. 오늘은 영어책 읽는 날이지? 씻을 때 너무 오래 씻지 말고. 자는 시간 계속 늦어지면 키 안 큰다.”


걱정이었을까, 협박이었을까.


나는 걱정을 건넨 것이었지만, 아이는 협박을 당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에게 협박을 당한 아이는 소파에 널브러진다. 

그리고 익숙한 몸짓으로 플레이 리스트를 야무지게 살피더니 오늘의 노래를 고른다.
곧이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훌훌 벗어던지고는 유유히 욕실로 향한다. 뒤이어 아이가 벗은 허물이 눈발자국처럼 길을 만든다.


이윽고 들리는 물줄기 소리. 

곧 아이의 노랫소리가 욕실의 에코 소리와 함께 거실 가득 퍼진다.



샤워를 마친 아이는 졸린 눈꺼풀을 몇 번이고 바로 잡으며, 책을 읽는다. 

불현듯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는지 엄마에게 조잘대려고 하던 찰나 나는 시계를 보며 내일 이야기하자는 곧 잊어버릴 약속을 한다. 


아이 옆에 놓인 타이머는 결승점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다. 

그렇게 꾸역꾸역 남은 시간을 고군분투하며 마침내 아이의 독서가 끝이 난다.


아이의 독서 시간을 체크한 나는 서둘러 불을 끄고 아이와 잠자리에 든다. 

금세 곯아떨어진 아이의 숨소리 위로 하루를 마무리한 안도감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나의 불안들이 차곡차곡 내려앉는다. 


밤 12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오늘은 영어 숙제 하는 날이야. 리딩 끝내고 영어 단어도 외워야 해. 과학 숙제도 있잖아. 학원 시간 지금 한 시간 반도 안 남았어.”



하교를 마친 아이가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나는 간식을 아이 앞에 내놓으며 해야 할 일을 AI처럼 열거한다. 

생글거리며 간식을 먹던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나는 벌어지려는 아이의 입을 학원 성적 이야기로 막아버린다. 

아이는 그런 엄마가 익숙한 듯 남은 간식을 마저 입으로 욱여넣는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거실 한복판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옆에 쌓여 있는 숙제를 하나씩 해치운다.



"엄마, 이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아이가 내민 책을 보는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까만 것은 알파벳이요, 흰 것은 바탕일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뿐이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번역기의 도움을 받는다. 번역기는 문어체도 구어체도 아닌 애매한 어체로 반절의 도움만 주었고, 나는 그것을 다시 해독해야 했다. 그러고서는 아이에게 도움 같지 않은 도움을 던지며 빨리 하라고 다시 한번 다그친다.


 5학년 아이가 나에게 내민 것은 토플책이었다. 주니어 토플도 아닌 그냥 토플.


아직도 해야 할 숙제가 쌓여있고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은 가까워져만 오는데 진흙탕에 빠진 운동화처럼 아이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않는다. 아니, 낼 수가 없다.











한창 코로나가 창궐하던 2학년 6월의 어느 날, 아이는 ADHD 진단을 받았다. 


말을 잘하던 아이였다. 

늘 궁금한 것이 많았고, 옆에서 조잘대는 것을 좋아하던 보통의 아이였다. 

가끔 친구와 다투기도 했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정이 많은 아이였다. 

고집이 세기는 해도 옆에서 끊임없이 설명해 주면 납득하고 내려놓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ADHD 판정을 받았다. 


내가 알던 아이의 성향이 모두 ADHD 증상이라고 했다.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과 조우하기 싫었던 나는 동굴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오던 날, 아이는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약물은 특별했던 아이를 조금씩 평범하게 만들어 주었다. 


쉴 새 없이 재잘대던 입이 멈췄다. 

자신만의 독특한 놀이를 만들어내던 손이 멈췄다. 

새로운 경험에 반짝이던 눈빛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아이 고유의 세상도 함께 멈췄다.


아이는 자신의 세상을 잃은 대신 다른 아이들과 같아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다. 

아이의 뜻이 아니었다. 

더 이상 특별해지고 싶지 않은 엄마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멈추어 버린 아이와 특별한 아이를 잃은 엄마는 서로를 할퀴어 갔다. 

상대를 할퀼수록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가장 아픈 곳을 겨누었다.


아이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던 때에는 아이가 특별하기를 바랐고,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아이가 평범하기를 바랐던 아이러니한 나의 이기심은 아이의 세상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난 아이는 어떻게든 엄마의 욕심에 부응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구멍 사이로 시린 바람이 들어와 고통스러운 날에도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아이였다.



"엄마, 나 오늘 단어 시험을 너무 못 봤어.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이 안 났어. 미안해."



텅 빈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아이가 초라한 점수를 받고서 가장 먼저 걱정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 


그랬다. 

아이의 세상에 가장 큰 구멍을 낸 이는 바로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엄마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한 사람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 해외로 가자.”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던 남편의 처절한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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