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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은벼 Nov 02. 2024

너는 나의 탄산수다

활어에서 열대어가 된 그녀

“어머. 너무 예쁜 딸이네요. 

몇 개월 됐어요?”

“이제 백일 조금 넘었어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커다란 눈망울을 반달로 만들며 

환하게 웃는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아이가 막 5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신축 아파트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기 바빴다. 

왕소금에 팍팍 절여진 배추처럼 

떡이 진 머리를 하고 

5개월이 갓 지난 예민한 아이를 

혼자 돌보는 것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눕히면 울고, 

분유를 줘도 울고, 

앉혀 놔도 울었다.



결국 나는 한 팔로 아이를 안고 

나머지 팔로는 온갖 집안일을 해야 하는 

멀티봇이 되어야만 했다.

 

지친 몸과는 달리 

마음속은 어른과의 수다가 너무 그리웠다. 

옹알이만 해대는 아이에게 

혼잣말을 해주는 것도 지쳤고,

내 필사적인 노력에도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결국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아파트 카페에 글을 올렸다.


‘흑룡띠 아이 키우는 맘들 계신가요?’


결코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던 나도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육아 생활에 지쳐 

백기를 들고 만 것이었다. 

괜히 글을 썼나 하는 마음에 

몇 시간을 안절부절못했는데 

곧 답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는 6개월 된 아들 키우고 있는데 

하루 종일 너무 심심하네요.’


‘저는 백일 조금 넘은 딸을 키우고 있어요. 

흑룡띠 모임 해요.’


‘저도 모임 하면 참석할게요.’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엄마들의 기대감들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지 않아 모임 날짜가 잡혔다. 


고맙게도 한 엄마가 

자신의 집을 먼저 오픈해 주었고, 

아기띠와 유모차로 중무장한 엄마 부대들이 

속속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도중 

앳되어 보이는 엄마와 

한눈에 봐도 엄마를 닮은 예쁜 여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참을성 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던 아들을 

트램펄린 태우듯 토닥여 가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한눈에 봐도 어려 보였던 그녀는 

역시나 나보다 5살이나 어린 새댁이었다. 

허니문으로 아이가 생겨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딸을 낳았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주를 했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친해지기 시작했고, 

베이스캠프는 엄마들이 제각각 소모임을 만들며 

하루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나는 왜 그녀에게 끌렸을까?


동생보다는 친구나 언니가 편했던 내게 

그녀의 인상은 퍽 강렬했다.

그녀는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펄떡였다. 

나에게 어딜 같이 가자고, 

무얼 함께 사자고, 

언제가 괜찮냐며 

늘 물어오던 것은 그녀였다.



“언니, 우리 이번에 

같이 백화점 문화센터 등록해요.”


“언니, 일산에서

 베이비 페어가 열린다는데 같이 가요.”



타고난 게으름뱅이였던 나를 

세상으로 이끈 것도 그녀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함께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당시 우리는 모두 장롱면허였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어떤 날은 택시를, 

또 어떤 날은 함께 버스를 타며 

끈끈한 아기띠 전우애를 쌓아갔다.




그녀는 나와 닮은 듯 다른 육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에 나는 그녀의 육아관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집안 청소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장을 봐온 바구니를 그대로 주방에 두기 일쑤였다. 

장바구니를 본 그녀의 딸이 우사인볼트처럼 달려가 

장바구니를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흙 묻은 당근이 쏟아지고, 

뒤이어 양파망도 머리채를 잡혔다.


하지만 위험하지만 않다면 그녀는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아이들의 간식거리인 떡뻥도 

그녀는 놀이 매트 위에 쏟아부었다. 

떡뻥을 먹는 건지 먼지를 주워 먹는 건지 

아이 둘은 전투적으로 덤볐고, 

나는 보고 있을 수도 말릴 수도 없어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고 있어야 했다.




집중하지 못하는 내 아들과는 달리 

그녀의 딸은 그녀가 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하면 

저 먼 곳에서부터 눈에 레이저를 발사하며 기어 왔다. 

그러고는 빵빵한 기저귀를 방석 삼아 엄마 옆에 자리를 잡고는

책의 내용에 집중했다. 

나는 그 모습이 놀랍기도 부럽기도 했다.


그 모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리면 

블루래빗 귀와 씨름하고 있는 내 아들이 보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지내던 와중 나는 남편의 이직으로 

갑작스레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당시 그녀와의 이별은 담담했다. 

나는 서울보다 넓어진 집에 대한 설렘과 

새로운 곳에서 지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아쉽고 슬픈 마음들을 내게 쏟아냈지만 

나는 또 만나자는 기약 없는 인사와 함께 서울을 떠났다.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며 

3년 이상을 서울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잊을만하면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잘 지내요? 

이번에 둘째 때문에 너무 속상한 일이 있었어요.”


“너도 그랬어? 

나도 우리 아들 때문에 최근에 너무 힘들었었거든. 

유치원 친구들이랑 자꾸 트러블이 나는 바람에 

애 친구 엄마들이랑도 관계가 서먹해졌어.”


서로의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로 이어지는 마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끈을 늘 쥐고 있었던 건 그녀였다. 

내가 그 끈을 느슨히 잡았을 때도 

그녀는 절대 끈을 놓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드디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다시 같은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고, 

12개의 반이 있던 과밀 학교에서 

그녀의 딸과 나의 아들은 같은 반이 되었다.

우리는 정말 하늘이 준 인연이라며 얼싸안았고, 

다사다난했던 1년을 보냈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겨울방학, 친했던 엄마들 넷이 

육아 품앗이를 하기로 했다. 

돌아가며 각자의 집에 초대해 

아이들끼리 놀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고 

모두 같은 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어색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곳을 가도 

우리 아이가 있으면 트러블이 생겼다. 

치고받는 물리적인 트러블은 없었지만, 

우리 아이는 놀이 규칙을 잘 따르려 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친구들을 이끌려고 했다. 

당연히 친구들은 거절했고, 

아이는 토라져 놀이에서 빠져 버리고는 했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소아 정신과로 아이를 이끌게 되었고, 

결국 아이는 ADHD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녀에게 말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다행히 내 아이는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심한 증상은 아니었기에 

나만 입다물면 모두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비밀을 묻어두고 혼자 고통을 모두 삼키기에는 

내 그릇이 부족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내 고통을 쏟아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아픔은 수문을 열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다. 

눈물범벅이 되어 그녀를 보니 

그녀 역시 울고 있었다.



“언니, 우리 아이들이랑 같이 놀아요. 

언니가 부르면 나는 언제든지 아이들과 나갈게요. 

그리고 언니는 내 정신적 지주잖아요. 

아들 지혜롭게 잘 키울 거예요.”



그때 나는 그녀와 연결된 끈을 

내 가슴과 묶고 단단히 매듭지었다. 

그녀를 내가 먼저 마음속으로 당긴 순간이었다.










해외로 오기 전 그녀와 마지막으로 

신사동 가로수길 핫플에 갔다.


“언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오늘은 내가 쏠거니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돼요.”



사실 그녀는 퍽 여유로운 편이었다.

강남에서 나고 자랐지만 

강원도를 사랑해서 

여름마다 강원도 이곳저곳에서 한 달 살기를 했고, 

겨울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호주로 서핑을 갔다.


덩치가 큰 내 아이가 입다 작아진 내복까지 

야무지게 챙겨 

첫째와 둘째에게 입혔던 그녀는 

언니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작아진 내복을 준 것뿐이지만 

그녀는 내게 꼭 고맙다며 밥과 함께 커피를 샀다.




한국을 떠나온 지 1년 하고도 3개월이 훌쩍 흘렀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따금씩 한국에 있는 그리운 얼굴들이 

나도 모르게 눈앞으로 튀어 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그녀이다.





활어 같던 그녀도 

세월이 흐르고 세상을 알아가며 

수족관 속 열대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싱그러운 눈빛과 

내가 너무 좋다고 말해주는 마음만은 그대로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밍밍했던 내 인생에 

그녀는 탄산수처럼 다가왔다.

햇빛이 내리쬐는 더운 날,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날, 

비가 내리는 흐린 날,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보통날에도 

톡 쏘는 탄산수처럼 내 모든 감각을 한꺼번에 깨우는 그녀.




오늘따라 그녀가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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