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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동하다 Jan 03. 2021

서른 하나의  처음들

연초 다짐보다 중요한 것들 

늘 결산을 빼먹고 계획으로 넘어가다 보니 

올해는 계획이 늦어지더라도 결산을 하고 싶었다.


내복약에는 아직 30이라고 찍히는 시간들. 

올해는 수많은 내복약을 타게 됐다. 

그간 이십대 중반부터 들어놓은 실손이 무색하게도 단 한 번도 실손 청구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병원을 안 간 건 아니지만 워낙 소액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수많은 병원을 들락날락하게 되는 해가 됐다. 


- 교통사고로 입원

1월 7일 비오는 날이었다. 급하게 인터뷰를 마치고 왔다. 팀장의 화난 목소리에 수원에서부터 급하게 왔다. 돌아와보니 뭔가 상황은 종료됐는데 팀장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얼굴에 피가 몰릴 정도로 긴장과 흥분 속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기운이 쭉 빠지는 순간이었다. 도보와 도보 사이에 두 걸음이면 충분히 건너갈 수 있는 횡단보도 거기서 아차- 하는 순간 사고가 났다. 맞은편에서 오던 오토바이는 운전자는 노란 우산을 쓴 나를 보지 못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에 갔다가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코로나19 이전의 입원 생활을 경험했다. 한방병원의 특성상 거동을 할 수 있되 주로 잠을 잘 때 통증이 몰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용 휴게실은 늘 붐볐다. 온돌바닥에서 티비를 보는 사람, 늘 성난 전화를 하던 사람, 와중에 공부를 하던 사람까지도. 그들과 함께 나도 일터에서 양해를 구해서 몸휴가를 얻은 사람이었다.  


- 커피빈 모닝 

코로나19로 인해 남편과 출근길을 함께 했다. 이전에는 엄두도 못내던 차를 끌고 출근하기. 당시 남편과 나는 회사가 안국역에 있었다. 도보로는 15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에. 8시 전까지 출근하던 남편과 9시 전까지 출근하던 나. 그간 함께 출근할 일이 없었는데 안전을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자고 하면서 함께 이동하게된 것. 늘 장성규의 아침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했다. 라디오를 들으면 재밌는 것은 라디오 내의 코너는 큐시트에 따라 일분의 낭비도 없이 진행하기 때문에 이데일리의 기자가 나와 오늘의 뉴스를 브리핑해줄 때 우리가 있는 위치에 따라 그날 남편의 지각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청운동에 이미 가 있을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이제 막 홍제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출근을 하기 전 일곱시반에 문을 여는 커피빈에서 아침을 시작했다. 안국역 커피빈 2층에서 계단을 돌면 보이는 창가자리를 7시 40분부터 8시 40분까지 지정석화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해가 어느 위치에 걸리는지를 봤다. 

올해 (나홀로) 급격히 가까워진 이슬아 작가와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 퇴근 후 아지트 부쿠

역시나 함께 퇴근하게 될 날 야근하는 상대를 기다리기 위해 1~2시간씩 시간을 보내던 곳이 안녕 인사동에 생긴 부쿠였다. 따뜻한 조명에 빠져들고 소설 코너의 큐레이션이 훌륭했다. 물론 커피 맛도. 이제 막 생겼는데 당시 코로나19가 확산되는 때라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오픈한 안녕 인사동 4층엔 정말 사람이 없었다. 어떤 날은 일주일에 두세 번을 가기도 했다. 부쿠에서 퇴근 후 카페인과 텍스트를 보충했다. 거기서 허수경을 만났고 제임스 설터를 만났다. 몇 번의 마감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름마저도 문학적인 음료와 허수경의 유고집

- 메일로 편지 쓰기

복직을 하고 나니 이메일 뉴스레터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생겼다. 뉴닉, 어피티, 썸원 등 닥치는 대로 구독을 했다. 아침에 일찍 출근을 하고 났을 때에는 이메일을 쓰고 싶어졌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썼다. 남편의 회사 메일로 이메일을 쓸 때의 기분이란. 그에게서 답장을 받고 나니 업무 메일로 가득한 이메일함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준 잠깐의 설렘, 휴식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 주식을 시작했다

16년에 새로운 부서에 발령을 받고 출입처인 엔*에 간 날 주주총회였다. 두 노인이 손을 붙잡고 걸어가 주주총회 명부에 싸인을 했다. 보유 주식은 만 단위였다. 강렬히 인상에 남았다. 주식을 한다면 꼭 엔*을 사야지 결심했다. 하지만 주식을 어떻게 하는지까지가 너무 어려웠다. 결국 계좌 개설도 못 하고 4년을 허비했다. 그 사이 엔*은 4배 가까이 성장해 있었고 저희 주식은 사지 마세요 절대 안 올라요, 했던 카*오도 3배 가까이 올라 있었다. 그 동안 최소한의 적금 재테크조차 하지 않고 있던 내 계좌의 돈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지. 주식을 하면서 현재 돈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더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는 곧 기회비용이었다. 최고의 수익률은 바른손이앤에이, 에이스토리... 최고의 마이너스는 수젠텍, 큐캐피탈. 

-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

아마 네스프레소 버츄오 + 에어로치노 소비와 더불어 나의 가장 훌륭한 소비가 될 유튜브 프리미엄. 우는 아이 달래기에도 효과가 컸지만 이를 통해 끊김 없이 유튜브의 알고리즘 세계에 투신했다. 특정 채널을 좋아하기 시작하다 몰입하다가 어느 순간 현자타임처럼 그 채널에서 깨어나오는 사이클을 바라보는 게 흥미롭다. 올해의 유튜브는 14F 소비더머니(브랜드를 설명해줄 때 특히 강하다), 강하나 스트레칭(자주 못해서 죄송해요), 유퀴즈(사실상 유퀴즈를 본방 대신 유튜브로 봤다), 문명특급(제제여 사랑한다)  


- 부서의 변경과 이동

기존의 조직이 쪼개졌다. 그 과정에서 떠나는 이에 대한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떠나는 이를 위해 다했던 예의를 돌려받지 못했을 때 상심이 컸다. 외면하게 되는 순간이 됐다. 그리고 부서 이동. 진인사대천명이라지만 늘 예상을 어긋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 


- 가을밤과 혼맥

가을밤은 혼맥을 하기 위한 시간이다. 서강대 숲길에서 하숙이라는 아주 좋아하는 술집을 찾아냈고 나무에 달린 알전구는 가을 밤을 채워주기에 더할 나위 없다. 퇴근하고 지나가다가 혼맥을 안할 수가 없었다. 그곳은 시나몬파우더를 아낌없이 뿌리고 잔 주둥이에는 설탕 결정체가 달라붙은 코젤 다크가 아주 훌륭한 곳이다. 친구가 합류해 더 좋은 시간이었다. 


우주 최강 코젤다크

- 두 차례의 입원

입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7월엔 조직검사를 해야했고 8월엔 맹장수술을 받았다. 안국역의 모 병원에서 제대로 진단을 내리지 못해서 맹장염을 키워서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갔고 이미 미열이 난 상태라 코로나19 검사를 받아야 했다. 10시간에 달하는 대기 시간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아예 기력이 없어서 의자에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이는 찻잔 속 태풍이었으니... 진통제를 끊고 나서 타병원으로 전원하는데 돌로 가득찬 주머니에 두꺼운 송곳이 들어있어 조금만 움직여도 찌르는 것 같은 맹렬한 고통이 반복됐다. 이래서 맹장인가. 이후 3일간의 금식을 해야 했다. 고름주머니도 차고. 


- 다짜고짜 글을 쓰다

지난해 뉴욕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는 시 쓰기 수업을 들었을 때를 말했는데 시를 쓰는 건 내 무의식을 때려넣는 행위인데 그게 참 좋았다고 했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다음날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일정도 올스톱이었다. 호텔방에서 창을 바라보면서 한 일은 글쓰기 수업에 등록한 것이었다. 그렇게 선생님을 만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얼마나 꾸준히 쓸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 네이키드 라운지를 시작하다

육아휴직을 하던 시간 너무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갈증이 너무 심했다. 큰 맘 먹고 트레바리를 등록했다. 공식적으로 월급이 없는 일년을 보내는 휴직자에게 아주 큰 결단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독서모임과는 달랐다. 전적으로 어떤 멤버와 파트너를 만나느냐가 중요할 뿐 트레바리 측에서 관리해주는 손길은 느끼지 못했다. 독서모임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혜빈언니와 의기투합했다. '나를 투명하게 꺼내놓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독서모임 이름을 정했다. 치코에서 내가 사랑했던 카페의 이름 네이키드 라운지를 가져왔다.  오로지 여성으로 구성된 모임을 꾸렸고 시즌 2까지 했다. 누군가 말했다. '불편함이 하나도 없는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그때 느꼈다. 남성이 이끌거나 남성으로 구성된 모임에 끼어있는 동안 불편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불편함을 참아야했던 거라는 것을. 앞으로 네.라를 어떤 플랫폼으로 키워갈지는 고민해야 할 부분. 

서촌의 표갤러리 독서모임을 하기에 호사스러운 공간이다 매달 바뀌는 컬렉션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매달 바뀌는 새 책이 주는 분위기가 어우러져 늘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 아기의 두 살

그간 아이도 자랐다. 살이 붙고 움직임이 많아지고 말을 하고 자아가 생기는 아가. 많은 순간 행복했지만 아이가 '잘자' 해주던 순간 받았던 위안을 생각한다. 잘자- 라는 말이 이렇게 예쁠 수 있는 건가. 성시경의 라디오를 들었을 찐팬처럼 그말을 자꾸 듣고 싶어서 나도 잘자를 반복했다. 잘자- 라는 말에 치유받아 본 경험. 두번째는 아이가 단어를 조합했던 순간. 반신욕을 하고 있는데 엄마 책 - 이라며 내 책을 갖다줬다. 후회없이 사랑하고 아껴주고 그가 어느 순간 나에게서 떨어져 독립해 나갈 순간을 받아들일 것. 아주 어려운 과제를 얻은 느낌이다. 


- 집콕이 편해지다

친구 단호는 말했다. 밖으로 나갔다오면 집에서 내 안의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정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다시 나가서 사람을 만날 땐 그 정화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고. 그는 외출을 할 때 미리 두려움을 많이 갖는 편이었다(하지만 또 나에게 번개는 잘 쳤다) 반면 나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면 안달이 날 정도로 밖에 있는 게 기본값이었다. 그런 나에게 동네 카페조차 가지 못하는 거리두기 2.5단계는 미드에서 "You're grounded"하면서 근신 처분을 내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이제 난 집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으며 스케줄러가 채워질 때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 조금 더 재택에 잘 맞는 공간 구상을 위해 책장을 새로 주문할 생각이다. 


그럼에도 너무 그리운 공릉 카페의 크로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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