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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동하다 May 08. 2021

그들의 해피엔딩이 밉지 않은 이유

장류진 <달까지 가자>  '우리 같은 애들' 이야기


* 이 글에는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난 이게 우리 같은 애들한테 아주 잠깐 우연히 열린,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해.


 장류진의 소설 <달까지 가자> 속 인물들 은상, 다해, 지송 세 사람은 소설 속에서 '우리 같은 애들'로 표현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참으로 영리하게 인물을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그 세사람은 단순히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있는 우리 같기도 하다. 


달까지 가자 표지 이미지 


 소설 속 세 사람의 관계는 회사에서 만났지만 서로에게 '회사 사람'이 아닌 존재다. 다른 회사 사람과 뚜렷하게 선을 그으며 회사 생활을 버텨 간다. 처음에는 작은 가십, 정보를 공유하면서 회사 내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키웠고 가끔 회의실을 하나 잡아 야근을 같이 하기도 한다.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에 '세 사람 친했어?' 하는 의외의 반응이 돌아오지만. 그들의 연대감은 메신저 그룹 채팅방 이름 'B03'에서도 확인되는데 회의실을 가리키는 이름 같기도 하지만 '비공채 출신 3인'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큰 회사가 아닌 곳이다 보니 같은 사번이고 공채 출신이면 같은 동기로 묶이게 되는데 이들은 각각 경력 채용, 인턴 후 정규직 채용, 수시 채용 등의 과정으로 이 회사에 오게 돼 동기가 없다. 동기가 없다는 건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을 겪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처음으로 논의하거나 지지대가 되어줄 대나무숲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게 얼마나 개개인을 회사에서 더 무력하게 만드는지 아니까. 처음에 입사를 같이 했다는 이유로 동기로 묶이지만 내부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동기에 묶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벽이 될 수 있는지 느꼈다. 

이들은 몇년 째 5단계의 인사평가에서 3단계에 해당하는 M(Meet requirement : 요구 충족)을 받는다. 이들을 서로를 무난이들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지송이의 경우 일종의 무기계약직으로 인사평가조차 받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지송 역시 다른 이들보다는 은상, 다해와 가깝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 이상으로 이들을 묶어두는 건 서로가 같은 계층이라는 동류 의식이다. 같은 세계에 있다는 의식이다. 작가는 정확히 소설 전체를 3막으로 따진다면 1막의 마지막에 결정적인 서술을 집어넣었다. 이들이 설명하는 연대감이 왜 필연적인지 우리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하면서 회사 내에서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이들을 응원하게 만들도록 쐐기를 박는 것이다. 



소설 속 다해의 표현을 빌어보자. 


은상 언니, 지송이, 그리고 나. 우리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암묵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년간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같은 회사에 다녀도, 비슷한 월급을 받아도, 결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이에는 투명한 선과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었다. 일터에서 일 이야기만 할 수는 없었다.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만나 걸어오면서, 매일 점심 먹을 때, 또 저녁 먹을 때, 거길 오가는 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로비에서, 회식과 워크숍 술자리에서, 그리고 거길 향하는 버스 안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싫어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캐치해서 추측하고 재배열하고 그 아래에 내 자리를 만들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랬다. 잡담 속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정보들. 어느 동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지, 출퇴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주말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명절에 어디에 가는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같은 것들. 강남 주민, 유학파, 교수 딸, 의사 아들. 그런 걸 알고 난 후에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 이상하게 작아졌다. 부러움, 질투, 이런 상투적이고 민망한 이름들이 붙기도 전에 정말로 오장육부가 물리적으로 수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알게 된 즉시 쪼그라들었다. 당연히 이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p103-4 


다해는 어른이 되면서 사람이 같은 회사에서 같은 월급을 받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해도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머리가 깨닫기 이전에 몸이 깨닫고 반응을 하는 식이다. 어찌어찌해서 같은 회사라는 공간에서 같은 체계의 직급, 직함 속에서 위치하고 나와 같은 넓이의 책상 하나, 냉동고의 비좁은 얼음칸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고 해도 집에 돌아가는 방법, 사는 집이 있는 동네와 주거 환경, 휴일과 휴가를 보내는 방식, 가족과의 관계 등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안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계급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고 결혼, 출산, 육아 등의 대소사를 거치며 계속 든든한 어떤 디딤돌이 되어줄 무언가다.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런 다해가 은상 언니, 지송은 마음 놓고 편히 좋아할 수 있었다. 이들과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위축되거나 자신의 삶이 딱히 별로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다해 말처럼 같은 '부류'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힘을 행사하거나 무언가를 베풀지 않아도 경제적 위계 차이가 사람을 얼마나 위축시키고는 하는가. 그 사람이 나에게 설령 밥 한 끼 더 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집이나 결혼, 하다못해 숙소를 하나 구하는 일에도 이야기를 할 때 최소한의 전제가 다르다는 생각을 할 때 갑작스러운 거리감을 얼마나 많이 느끼고는 하는가. 


하지만 은상 언니, 지송이와 이야기할 때는 그런 게 없었다. 첫날부터 우리는 우리가 같은 '부류'라는 걸 직감으로 알았고, 그 느낌을 바탕으로 한 호감으로 자주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아무리 탈탈 털어도 부모가 대졸자라거나, 더 나아가 공무원이라거나, 전문직이라거나 즉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라는 정보값은 없었다. 대신 여러 가지 이유들로 집안에 빚이 있고, 아직 다 못 갚았으며, 집값이 싸고 인기 없는 동네에 살고, 주거 형태가 월세이고 5평, 6평, 9평 원룸에 살고 있다는 공통 정보가 나왔다. 나는 이 사람들을 마음 놓고 편히 좋아할 수 있었다. 이 둘과 있으면 내 삶이 딱히 별로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서로가 자신의 자리에서 이 정도면 성실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이 갑작스레 하늘에서 열린 일종의 '포털'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들의 이더리움이 우상향 곡선 끝에 곧 열리고 말 폭락의 날(2018년 1월의 어느 날)으로 다가갈 때 독자들이 같이 가슴 졸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과는 달리 그들이 대참사의 날 직전에 투자한 자산을 현금화했을 때 비아냥 대신 응원하고 축하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남은 우리도 현생에서 자그마한 희망을 품어보게 만드는 것이다. 


대폭락의 날 이후 왜 가상화폐에 투자하게 됐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던 기억이 난다. 

집도 없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로켓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가 아니냐고. 

날로 커지는 부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냐고. 


처음엔 작가의 해피엔딩 결말이 의아했지만

이해가 되는 대목이 있었다. 

소설의 역할 첫번째가 대리만족 아니던가. 

그 세계에 가봤다. 

달로 가는 그 세계에. 

그리고 또 하나의 가정법을 더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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