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 읽게 되는 책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재미가 없는 책. 자꾸 주의가 산만해져 글씨 위에 상념이 떠다니는 경우다. 글씨에 눈길은 주고 있으나 아무 의미도 읽어내지 못하는 상태라고나 할까. 이런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보지 못할 확률이 높다. 두 번째,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는 책. 아주 꼭꼭 씹어 읽으면 더듬 더듬이나마 의미를 찾게 된다. 나에게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그랬다. 이런 책은 분량이 많다면 완독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너무도 내 취향인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뒤통수 또는 가슴을 때리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이런 문장을 자꾸 만나면 책을 빠르게 읽지 못한다. 그 문장을 또 읽고, 바라보고, 밑줄을 긋고, 한숨을 쉰 후에야 다음 문장에 눈길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는다.
내가 뭘 본거야 지금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다루는 문학을 선호한다. 사랑, 삶, 죽음, 도덕, 자유처럼 단어만 봐도 묵직한 것들. 이 안에서는 작품만 좋으면 무엇이든 인생의 책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아, 지금까지 나의 인생 책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세상의 삿된 놀이에 빠져 수년간 잃어버렸던 독서가로서의 정체성을 되돌려준 책이기 때문이다. 그 후 본격적으로 다양한 책을 읽었고, 쌓여가는 독서 목록의 옆길로 현생도 이어졌다.
현생의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자꾸 심드렁해졌다. 말로 하는 약속은 믿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확신은 업신여긴다. 이런 성향은 특히 사랑을 할 때 치명적인 단점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면 깨어진 약속을 보는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상할 정도로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남이 되는 미래를 미리 알아두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예상과 다른 이유로 끝장이 났다. 겪을 때마다 무덤덤해졌다. 20대 초반에는 사랑이 없으면 인생도 필요 없었는데. 감정의 진폭이 적어지는 건 낭만을 내어준 결과라고 여겼다.
약 2년 전, 이 생각을 셀프로 비웃게 됐다.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렀던 책들이 일제히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로맹 가리의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등이었다. 물론 이 책들이 사랑만 말하지는 않는다. 다층적인 주제의식을 지닌 작품들이지만 내가 쉽게 넘기지 못한 페이지에는 모두 사랑의 순간이 적혀있었다. 어떻게든 계속되고, 무엇이든 희생하며, 영원히 잊지 못하고,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을 향한 낭만이 독서 생활에서 불타고 있었던 거다. 건조한 현생을 장작 삼아 활활.
INTP 좀 이런 이미지 아닙니까?
MBTI를 정식으로 처음 해봤던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변함없는 INTP다. 단 한 가지 테스트의 결과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밈으로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한다. INTP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객관적인 분석가, 아이디어 뱅크, 논리, 분석, 문제 해결, 사회성 부족 등이다. 이 키워드만 봐도, 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욱 사랑을 표현한 문장에 감동해 숨을 몰아쉬는 INTP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할수록 트롤짓 하는 놈이 뭐가 어째?
하지만 INTP에게는 또 다른 대표 특징이 있다. 바로 높디높은 이상. 이상적인 사랑을 삶의 매 순간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니, 어슴푸레하게 꿈꾸었던 아름다운 이상을 그대로 적어놓은 사랑 이야기에 흥분하는 것 역시 INTP다운 거 아닐까. 사랑의 문장을 좋아하는 INTP는 분명 많을 거다. 다만 공감은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감동할 뿐이다.
~라고 INTP가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낭만적인 독서 취향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이로써 납득에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