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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Aug 26. 2021

삶에 초록을 만들어 준 책

<랩 걸>을 읽은 후에야 식물이 진짜 생명임을 알았다


괴상한 마귀 구슬과 하얀 귀신


얼마 전 세를 얻은 작은 사무실에는 나 말고 둘이 더 있다. 작은 파인애플 같은 귀여운 외형에 괴마옥이라는 괴팍한 이름을 갖고 있는 식물이 하나, 잎 속에 물을 가득 머금은 듯한 투명함이 매력적인 하월시아 레투스 화이트 고스트라는 식물이 하나. 괴마옥의 마는 마귀 마魔를 쓴다고 하고 화이트 고스트에는 귀신ghost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무슨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괴마옥은 지름 8cm의 화분, 화이트 고스트는 지름 9cm의 화분에서 자란다. 처음 내 공간이 생겼을 때 식물을 들일 생각을 했다. 하나는 좀 외롭지. 근데 종이 다르고 다른 흙에서 자라도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있나? 의문은 들었지만 일단 둘을 데려왔다. 출근하면 먼저 식물을 들여다보고 만져본다. 지금쯤 물을 줘도 될까, 내가 또 해줄 게 없나, 너희는 이 골방 같은 곳에서 잘 자랄 수 있을까. 궁금해하고 걱정한다.


학창 시절 몇 번 선물 받았던 화분은 늘 죽였다. 황토색 화분에 작게 올라와있던 선인장이 유난히 기억난다. 파랗고 싱그럽던 선인장은 마지막에 노랗디 노란빛을 띠다가 황폐한 몰골로 죽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식물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식물이 죽어나가는 이유를 잘못짚고 있었다. 내가 똥손이라서 그래, 나는 식물을 잘 키워본 적이 없어. 원래 식물 잘 키우는 손은 따로 있잖아. 그게 얼마나 바보 같고 잔인한 말인지 미처 몰랐다.


기다리고 선택하는 존재


식물은 기다림의 대가다.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내게 찾아올 날을 기다리고 버티는 데 도가 텄다. 식물이 얼마나 잘 기다리는지, 식물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성장하는지 알려준 건 호프 자런의 <랩 걸>이다.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의 추천으로 유명세를 탄 책이다. 눈도장을 찍어놓았다가 어느 한가한 날 펼쳐 든 <랩 걸>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놨다. 식물의 기다림과 성장을 경이로워하고 죽음은 슬퍼할 줄 아는 사람으로.


<랩 걸>의 초반에 씨앗의 기다림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읽었을 때 느낀 묘한 고양감을 기억한다. 식물의 경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씨앗은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를 만날 때까지 기다린다. 대부분의 씨앗은 1년 이상을, 체리 씨앗은 100년을, 중국의 토탄 늪에서 발견한 연꽃의 씨앗은 2천 년을 기다렸다. 적절한 온도, 수분, 빛과 다른 조합이 맞아떨어질 때까지 씨앗은 살아서 긴 시간을 버텨낸다. 때가 왔다고 판단하면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듯' 싹 틔우기를 선택한다.


이후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은 마음껏 자라고 새로운 잎을 만든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은 뿌리를 조금 더 늘리고, 줄기를 조금 더 키우는 데 만족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데 집중한다. 지금 잎을 만들고 성장하기로 한 판단이 틀렸을 때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여름에 대비해 새 바늘잎을 무성하게 만들어냈다가 이상 기후로 들이닥친 폭설 탓에 가지를 모두 잃고 죽음을 맞은 호프 자런의 은청가문비처럼. 그렇게 식물은 기다리고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살아있구나, 내 곁에서


<랩 걸>을 읽은 뒤 종종 식물을 보러 갔다. 줄기 끝에 갓 나온 연두색 새 이파리를 달고 있는 나무를 보면 기특했다. 가을이면 길에 숱하게 굴러다니는 은행을 보고도 씨앗이구나, 살아있구나 다. 내가 지켜보던 순간에도 기다림과 선택은 진행형이었을 것이다. 다시 식물을 키워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한동안 식물이 있는 곳을 기웃대며 장래희망에 조건 하나를 추가했다. 그냥 한량에서 난 닦는 한량으로. (꼭 난을 키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랩 걸>을 읽은 후에 반려식물에게 필요한 건 금손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려식물의 환경은 자연이 아니라 내가 조절하는 거니까. 반려식물은 빛, 물,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곧 나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식물이 마음껏 자라기로 선택했다면 기다리는 모든 것을 반려인이 제때 주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병들고 아프다면 반려인이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사무실을 얻고 반려식물을 들일까 고민할 때 매일 관심을 줄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봤다. 음,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숙한 반려인 탓에, 또는 쾌적하지 못한 환경 탓에 괴마옥과 화이트 고스트도 죽을 수 있다. 이제 내 식물이 죽으면 화분을 끌어안고 울지도 모른다. 죽기 전까지 분명 안간힘을 쓰며 버텼을 텐데. 생명을 대상으로 늦은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살펴본다. 아침이면 작은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게 해 주고, 괴마옥의 줄기가 말랑하지는 않은지 만져보고, 화이트 고스트의 이파리가 쪼글 해 지지는 않았는지 들여다본다. 오래전 흙으로 돌아갔을 황토색 화분의 선인장에게 이제야 미안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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