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안 좋았다. 12월의 시작과 동시에 아팠다. 2차 접종까지 마친 지 겨우 한 달 남짓이었다. 영 느낌이 이상해 서산에 내려가기 전에 자가진단키트를 해봤다. 양성이었다. 사람을 도통 만나지 않는데 어디서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위 누구에게도 전염시키지 않았다는 것.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냄새를 못 맡았고 맛이 안 났다. 이마저도 곧 회복되었지만 고작 2주 사이에 체력이 크게 떨어졌다. 슬슬 제 궤도에 올리려고 할 때쯤 연말 기분에 젖어 신나게 마셔댔다. 바로 거하게 탈이 났다. 윗배며 아랫배며 나눌 것 없이 쓰리고 꼬이는 느낌에 여덟 시간쯤 끙끙대다 병원에 갔다. 5일 치 약을 지어다 먹는 중이다. 아직 술이 꼴도 보기 싫지만 오늘은 2021년의 마지막 날, 미뤄왔던 연말 정산을 해야 한다. 대신 1편은 술 대신 책으로.
올해의 책 : 더버빌가의 테스
사실 올해에는 작년처럼(2020년의 책 :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단 번에 꼽을 한 권은 없었다. 고심 끝에 선정한 게 토머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다. <더버빌가의 테스>로는 긴 글을 남기기도 했다(내 욕정은 네 잘못이야 : 알렉 더버빌). 지금과 동떨어진 배경 속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내가 있는 지금으로 가져와 소화할 것인가를 깊게 고민하게 만든 책이라 선정했다. '등장인물로 주변 인물 이해하는 법' 시리즈를 써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고. 정작 이 시리즈는 <더버빌가의 테스>를 쓰고 기운 빠져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지구력이 부족한 편) 무엇보다 상당한 분량임에도 흡인력이 뛰어나 홀린 듯 읽었다. 세 등장인물의 종착지가 어디일까 궁금해 셀프 스포일러를 할 정도.
올해의 발견 : 이디스 워튼
이름은 익숙한데 작품을 접해보지 않았던 작가다. <이선 프롬>을 읽고 이디스 워튼의 특별한 능력에 감탄했다. 가장 비참하고 구질구질하며 저열한 감정을 포착, 묘사하는 데 천재적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내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 조목조목 옳은 말만 쏘아붙이는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폭력적인 생각, 자매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우월감과 질투심, 현학적인 말로 어떤 개념을 포장하지만 사실 아무도 본질적인 이해가 없는 집단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등. 뒤의 두 가지 사례는 <버너 자매> 속 단편에서 포착한 지점이다.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모른 척하고 지나갈 부분도 굳이 집요하게 묘사하는 바람에 독자가 대신 수치스러울 지경이다. 공감성 수치가 높은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괴로울 이디스 워튼의 작품들... <순수의 시대>도 사두었는데 내년에 바로(적독가에게 내년이면 '바로'인 수준) 읽지 않을까 예상한다.
올해의 한(恨) : 레 미제라블 완독 실패
<레 미제라블>은 대서사시라는 말이 무엇보다 어울리는 작품이다. 한 권, 한 권이 상당한 분량인데 도합 5권(민음사 판). 익숙한 이야기가 나오던 1권까지는 술술 읽힌다. 그리고 읽다 보면 의문이 든다. 내가 아는 장 발장 이야기는 여기까지인데, 벌써 이 이야기가 다 풀리면 중후반부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지? 사실 인간 장 발장의 죄와 속죄는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19세기 프랑스의 폭발적인 대격변을 다루는 소설이기 때문. 장 발장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는 워털루 전쟁에 관한 기나긴 서술, 왕정복고에 대한 기나긴 서술, 6월 항쟁을 묘사하는 기나긴 서술을 모두 거쳐야 한다.
초중반부까지는 역사적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 속 인물과 관계가 바로 뒤에서 맞춰지는 재미가 있어 비교적 따라가기 쉽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 빈약한 독자가 계속해서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을 꾸역꾸역 읽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결국 1권부터 4권까지 읽고 5권 초입에서 놓아버렸다. 소설의 특성상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면 내용이 가물거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왜 마지막 5권의 산을 넘지 못했는지 한스럽다. 2022년에 재도전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재미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니 재도전 하긴 할 듯.
2020년과의 비교
2020년에는 50권을 읽었고 2021년에는 40권을 읽었다. 시간은 더 많았는데 어째서 10권이 줄었나 살펴보니 전자책을 훨씬 덜 읽었다. 2020년에는 전체 도서 중 절반인 25권이 전자책이었다. 2021년에는 고작 4권만 전자책으로 읽었다. 내용적으로 2020년에는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래 있어서 익숙한 책(예를 들면 <잊기 좋은 이름>이나 <쇼코의 미소>)이 밀리의 서재에 들어오면 펼쳐 읽은 경우가 많았다. 2021년에는 뭐랄까, 엄격하게 취향에 맞는 책만 골라 읽었구나 싶은 목록이다. 결국 밀리는 해지해야겠군..?
레 미제라블을 읽던 여름 무렵 독서량이 곤두박질치는 바람에(올여름은 더웠고, 내 방은 정말 너무 덥다) 1년 독서량이 줄어버렸지만 내용적으로는 아쉽지 않다. 올해는 주야장천 문학에 집중해서 읽어대다가 막판에 비문학 중심으로 읽었다. 인스타그램에 적어둔 것처럼 갑자기 호랑이에 빠졌기 때문. 독서도 어느 정도 사이클이 있는데 호랑이를 시작으로 현재 비문학 사이클이다. 호랑이를 다룬 책을 읽다가(<위대한 시베리아의 영혼><꼬리>), 씨앗을 다룬 책을 읽다가(<씨앗의 승리>), 지금은 정신의학을 다루는 책(<미치광이 여행자>)을 읽고 있다.
2022년의 독서 목표
내년에 뭘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올해보다는 바쁘리라 기대한다. 올해는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었는데, 불안과 싸워야 했지만 온 하루가 내 것인 매일을 보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능력이라기보다 내 시간을 주고 월급을 받는다는 답답함이 직장을 다닐 때 가장 큰 괴로움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해방감은 당연할지도. 아무튼 올해보다 바빠도 올해보다 더 읽는 것이 2022년의 목표다. 다시 50권 이상의 수준을 회복하는 것이 1차 목표. 독서 기록을 체계적으로 자주 남기는 것이 2차 목표. 신간을 꾸준히 살펴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때맞춰 읽는 건 부수적인 목표. 어차피 2월 정도 되면 목표 같은 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연말에는 으레 반성할 지점과 목표를 고민해야 한다. 무차별적으로 모든 걸 권하는 세상에서 나와 내 취향을 잃지 않고 견고히 하려는 작은 고군분투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