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대에 포르투갈 선교사가 겪은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도이자 무신론자이다. 그래서였을까,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나는 결국 소설 속 인물들의 생각과 논리와 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와 다른 종의 이야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를 보는 느낌으로 겨우겨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다른 종도 그 행동엔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라거나 짝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납득 가능한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가기에는, 수많은 고통과 죽음이 너무나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전달되었다. 그래서 내게는 너무 힘든 소설이었다.
어릴 때부터 종교가 이해된 적은 없었지만 종교에 대한 생각은 종종 해왔다. 지금까지도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며 살아남았다는 것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 무언가가 무엇일지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신기하게도 해답은 종교계에서 박해했던 진화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진화의 기본은 돌연변이와 적응이다. 나무들의 키가 큰 지역의 기린의 목이 점점 길어지게 진화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무리 중 목이 긴 돌연변이를 가진 기린들은 다른 기린들보다 이 환경에 적응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이 살아남아 목이 긴 돌연변이의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보다 더 많이 퍼지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기린의 목이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어떠한 의도도, 의미고, 가치도, 옳고 그름도 담겨있지 않다. 자식 유전자가 형성될 때 '부모님을 보니 목이 길어야 먹이를 먹기 좋겠네. 그러면 목이 길어져야겠다'하고 목이 긴 돌연변이가 생기는 게 아니라, 무작위로 발생하는 돌연변이에서 운 좋게 목이 길게 발현된 돌연변이와 운이 나빠 그렇지 못한 돌연변이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목이 긴 기린이 예술적 가치가 있거나, 철학적 의미가 있거나, 윤리적으로 옳아서 적응한 게 아니라 냉정한 자연의 섭리에 의해 살아남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현상일 뿐 다른 해석을 붙일 수 없다.
나는 종교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종교 같은 걸 잘 믿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결집력, 심리적 안정, 사회적 인맥 형성 등에서 적응과 생존에 더 유리했고, 그 결과 진화론적으로 그 유전자가 점점 더 많이 퍼지게 된 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자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게 됐다. 종교가 자체적으로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졌는가와 독립적으로, 종교를 믿는다는 결과 자체가 주는 영향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남는다"라는 표현. 어쩌면 진화론의 관점에서 이렇게 한 단어로 쉽게 묶이면 안 될지도 모른다.
모든 동물은 늙는다. 우리는 이를 알고 있고, 삶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있다. 일단 멈춰서 잠시 생각해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앤디 돕슨,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코알라가 좋아하는 유칼립투스 잎은 매우 질기다. 이 잎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열심히 씹어줘야 하고, 그래서 코알라에게 이빨은 굉장히 소중한 자원이다. 하지만 그 중요한 이빨은 두 번째 이빨이 다 닳고 나면 새로 나지 않는다. 그래서 코알라는 사고나 외부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고령까지 가지 못하고 잎을 씹지 못해 굶어죽게 된다. 왜 이런 비합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됐을까? 이는 이빨이 마모되는 시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코알라의 이빨은 번식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끝날 즘에 완전히 닳아 없어지게 된다. 이 이후에 새 이빨이 나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에너지와 자원이 소모된다.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세 번째 이빨이 나지 않은 유전자가 더 많은 번식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즉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개인의 살아감과 공동체가 남는 것은 때론 경쟁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 경쟁의 진화적 산물이 노화다.
그렇다면 만약 여기서 코알라에게 임플란트를 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개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옳고 행복한 일이다. 부모는 더 오래 음식을 먹으며 살아갈 수도 있고, 새끼는 굶어죽지 않은 부모와 함께 더 오래 같이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는 것과 남는 것의 경쟁에서 사는 것을 골랐다는 것은, 그 결과가 공동체 멸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임플란트를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매우 어렵고 불쾌한 질문이다. 어느 쪽을 골라도 찜찜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이 질문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럼 입시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 수능은 볼꺼지? 선택 과목은 경정했어? 가산점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했고?"
나는 해원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게 있었다. 그러자 나보다 자기가 더 착잡하다는 얼굴이었다.
"넌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 기준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마."
나는 나의 20대를 웬만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백온유, <페퍼민트>
소설 <페퍼민트>에서 고등학생 나이에 영케어러가 된 주인공 시안과 그의 친구 해원이 나눈 대화다. 나는 가끔 이러한 일이 시안같은 개인이 아닌, 국가 단위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상상이 든다. 청년들의 취업난, 0.7대의 출산율, 점점 높아지는 중위연령, 고갈되어가는 사회보험 재정, 치솟듯이 오르는 부동산과 양육비를 생각하면 이 무서운 상상과 위에서 던져진 불쾌한 질문을 외면할 수 없는 시기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코알라처럼 미래 세대를 위해 윗세대가 희생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나는 최재천 교수님의 자연스러운 게 옳다는 건 아니라는 말을 좋아한다. 진화는 어떠한 의미도 가치도 윤리도 담겨있지 않은 가치중립적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의 이치와 상관없이 우리만의 옳음을 찾아야 한다. 나는 결론보다는 과정과 기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령 누군가의 직업보다는, 어떻게 왜 그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그 사람을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결정은 보류하더라도, 이 불쾌한 질문을 어떤 기준으로 풀어나갈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정답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단순한 다수결, 혹은 이 다수결을 이용하기 위한 표심의 재료로 이 질문이 사용되진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