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앨저넌에게 꽃을> 책으로 독서모임을 했다. 이 소설에서 지적 장애인이었던 주인공 찰리는 뇌 발달 임상 실험을 통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지게 된다. 그날 모임 때 한 분께서, 지능이 높아진 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하는듯한 언행을 하는 게 보기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찰리가 더닝 크루거 곡선에서 말하는 우매함의 봉우리에 있는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무언가를 배울 때 절망의 계곡을 느끼게 되면 오히려 안심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나는 절망의 계곡에 빠졌다.
8년 전쯤, 향수라는 세계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백화점 1층에서 시향을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아직 향에 대해 잘 몰랐던 시기라 단순히 좋다 싫다 정도로만 판단하고, 좋은 건 나중에 검색해서 어떤 노트가 어떤 향을 내는지, 나는 어떤 노트가 들어간 향을 좋아하는지 등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정말 마음에 드는 향을 만났다. 브랜드는 아쿠아 디 파르마였는데 이름은 아쉽게도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순간 이 향수를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격을 여쭤본 순간 깜짝 놀랐다. 향수 하나가 30만 원이라니. 당시 대학생이었던 내겐 너무 큰돈이었다. 갑자기 오기가 들었다. 혹시 나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향수와 그동안 괜찮았던 향수들의 노트를 정리해서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분석했다. 생각보다 내 취향은 명확했다. 탑 노트는 시트러스, 베이스는 바닐라, 나머지는 너무 날카롭거나 튀지 않은 향으로. 이 내용을 가지고 향수 공방에 찾아갔고, 이런저 향을 실험해 본 결과 아래 레시피로 내 첫 창작 향수가 탄생했다.
- Top: sweet orange, mandarin, bergamot
- Middle: lily of the valley, lavender
- Base: vanilla, moss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백화점에서 반했던 향수보다도 더 마음에 들었다. 가격도 5~6만 원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역시 나는 창작자이구나 하면서 그 후로 향수는 항상 공방에서 만들어 쓰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쓰던 향수가 유통기한이 지난 걸 발견하고 다시 만들 계획을 세우던 도중,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향을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랜만에 시향 투어를 하기로 했다. 한번 외출할 때 여러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해서 독서모임을 하는 날 시향도 같이 하기로 계획했다. 독서모임은 보통 혜화에서 진행되는데, 마침 옆 동네 북촌에 여러 향수 매장들이 모여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임이 끝나고 북촌으로 넘어가 한 곳씩 들러서 시향 하다가, 르 라보 매장에서 만나버렸다. 나를 절망의 계곡에 빠트린 녀석을.
르 라보 브랜드는 니치 향수에 관심이 많았던 지인이 SANTAL 33을 엄청 극찬했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막상 SANTAL 33은 향을 맡아보니 신기하긴 했지만 매력적이진 않았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ANOTHER 13은 살냄새 향수라서 착향 해보고 간택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재밌었다. 다만 내가 착향을 해보니 아무리 맡아도 샐러리 향이 났던 걸 보면 나는 간택 받지 못했나 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THE NOIR 29를 보여주셨는데 충격이었다. 어떻게 향으로 이렇게 찐득하게 달콤한 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착향 해보니 상쾌하면서도 따듯한 (말도 안 되는 표현 같지만 정말 그런 느낌이 났다.) 향이 나는 게 또 신기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맡아본 잔향도 깔끔한 부드러움이 너무 좋았다. 머릿속에 두 생각만 계속 빙빙 돌았다. 너무 매력적인 향이다. 근데 내가 절대로 만들 수 없는 향이다. 다음날 회사에서 일하는데 계속 그 향이 생각났다. 내 향수 제작에 대한 우매함을 뼈저리게 인정하면서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향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했던 향수랑 가격이 비슷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내 어떤 소비들은,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는다.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소비에 주저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에, 책에, 칵테일에, 그리고 이런 향수에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조금 비싼 가격이긴 했지만, 어차피 곧 생일이니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2년 전쯤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었다. 나는 칵테일 만드는 걸 좋아하고, 특히 창작 칵테일을 좋아한다. 칵테일이 취미라고 하면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 어떤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때 당당하게 내가 창작한 칵테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창작 칵테일을 시작한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최고인 칵테일을 찾고자였고, 실제로 다른 바에서 마셨던 칵테일보다 내 창작 칵테일이 내게는 더 맛있었다. 그러면서 창작했던 여러 칵테일들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좋아해 줬고, 현직 바텐더분께 칭찬을 받은 적도 있어서 나는 내가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다 2년 전 지인의 소개로 서촌에 있는 '바 참'이라는 바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송편'이라는 칵테일을 마셨는데 그 순간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액체이고, 거품이나 계란 흰자로 텍스처를 낸 것도 아닌 일반 맑은 액체인데, 어떻게 마시는 순간 송편을 베어 물었을 때 나는 감각을 표현할 수가 있을까. 칵테일을 마실 땐 다양한 맛을 보기 위해 계속 새로운 걸 주문하는데, 동일한 칵테일을 세 번 연달아 시킨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 난 칵테일의 절망의 계곡에 빠졌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런 게 정말 잘 만든 칵테일의 예술이구나. 그리고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겠구나.
벽을 깨부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 벽을 타고 올라가 넘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이 조금 평온해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벽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해줄 문을 발견할 것이다.
정담이 x 김유은 <난 내가 꼭 행복하지 않아도 돼>
누군가는 자신의 한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좋은 말이지만, 때론 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준다. 이세돌 9단은 1, 2, 3국을 통해 알파고가 자신보다, 그리고 모든 인간 기사보다 바둑을 잘 둔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일반적인 최선의 수로는 이길 수 없다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알파고의 한계도 파악했다. 어찌 되었건 한 수에 50초만 사용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대국이라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최대한 형세를 복잡하게 만드는 수를 유도했고, 결과적으로 알파고는 에러가 난 것 같은 행보를 보이면서 이세돌 9단은 4국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이토록 오래 전해져 온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말일 수도 있다.
내게 바 참에서의 경험도 그랬다. 나는 절망의 계곡을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다. 나는 분명 그러한 맛을 내는 칵테일을 만들 순 없다. 하지만 칵테일의 매력은 맛에만 있는 건 아니다. 칵테일은 시각적인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매력적인 스토리를 담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뒤로 스토리에 집중해서 칵테일을 창작해 보기로 했다. 책 내용을 배경으로 하는 칵테일도 이러한 방향성의 결과물이다.
중요한 건 소위 말하는 메타인지, 나를 잘 알고 내 한계를 잘 알아내는 것이고, 그러려면 결국 경험이 중요하다. 2년 전에 바 참에 방문하지 않았다면, 며칠 전에 르 라보 매장에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내 안에 갇힌 길에서 빙빙 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난 스스로를 의심하고, 경험으로 증명하는 걸 좋아한다. 최근에는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걸 정말 좋아하는지,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걸 정말 싫어하는지 확인하고 있다. 예전부터 익스트림한 걸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지난달에 패러글라이딩, 번지점프, 하늘자전거 타기를 했다. 난 스릴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 예전부터 물에 잠기는 걸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비염으로 인해 숨 쉬는 게 더 힘들고 중이염도 있어서 귀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지만 지난달에 강릉에 놀러 갔을 때, 친구 장비를 빌려서 스노클링을 해봤다. 나는 예전부터 물소리를 좋아했다. 빗방울이 바닥에 고인 물에 부딪히는 소리, 계곡물이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 등. 귀가 물에 잠긴 채 이동하면 모글모글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물소리가 들린다는 걸 이번에 처음 경험했다. 이젠 물에 잠기는 걸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오래 있다가 나오면 귀가 아픈 건 맞다. 수영을 배워볼까 고민하다가 집 근처에 없어서 쉽게 포기했다.
아직 향수 제작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 볼지 정하진 못했다. 열심히 살면서 다양한 자극과 경험을 하다 보면, 언젠간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정도의 느슨한 관심으로 두고 있다. 일단은, 올해 남은 기간은 그동안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노느라 미뤄뒀던 창작물들을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