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에 놀라워했다. 모든 결과에는 비용이 소모된다. 알파고의 놀라운 승리에 비해 그 대국에서 알파고가 일반적인 성인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약 8500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별로 주목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뇌가 가진 가성비(?)는 여전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슈카월드에서 소금쟁이가 물 위에서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비밀에 대한 영상에서 비슷한 대단함을 봤다. 빠르게 이동하는 곤충은 많지만, 소금쟁이의 이동 원리가 사이언스지의 표지에 실릴 정도로 주목받았던 이유는 소금쟁이의 근육은 작고 약할 뿐만 아니라 다리도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늘기 때문이다. 이런 다리로 어떻게 1초에 자신의 몸의 100배를 이동하는 경이로운 속도를 낼 수 있었을까?
답은 탄성 모세관 현상이라는 자연의 힘에 있었다. 탄성 모세관 현상이란 탄성을 가진 물체가 액체(물)의 표면장력에 의해서 모양이 변하는 현상인데, 쉽게 봐서 붓을 물에 넣으면 붓털이 펼쳐지고, 다시 꺼내면 모아지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소금쟁이의 발끝에 부채꼴 형태의 털이 있는데, 이 부분에 물에 들어가면 0.01초 만에 펼쳐지면서 그 힘으로 추진력을 받게 된다. 물에서 꺼내면 곧바로 접히고, 다시 물에 넣으면 또다시 추진력을 받을 수 있다. 소금쟁이는 이렇게 뇌나 근육의 에너지 소모 없이 자연의 힘만으로도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듣자마자, 물론 이런 과학현상도 신기하지만, 소금쟁이가 이 힘으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볍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소금쟁이가 무거웠다면 이런 자연의 힘을 얻기는커녕 외부의 도움 없이는 가만히 떠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과연 자연에게 힘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일까
우리는 과연 자연에 의해 행복할 수 있는 상태일까
우리는 과연 자연스럽게 즐거울 수 있는 상태일까
필터 버블에 갇히지 않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든 시청 기록과 검색 기록을 초기화하곤 한다. 그다음 대중적인 영상을 딱 하나만 보고 유튜브 메인 화면에 들어가면 거의 랜덤한 영상들이 추천된다. 이때 추천되는 영상들을 보면 콘텐츠들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진다. 우리는 대부분의 감각을 상대적으로 받아들인다. 손을 한쪽은 뜨거운 물, 다른 한쪽을 차가운 물에 넣었다가 양손을 미지근한 물에 넣으면 뜨거운 물에 넣었던 손은 차갑게, 차가운 물에 넣었던 손은 뜨겁게 느껴진다. 도파민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경험한 도파민에 의해 역치가 결정되고, 이를 넘지 못한 자극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영상 콘텐츠들 사람들을 계속 만족시켜주기 위해, 혹은 다른 영상보다 더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는 점점 더 자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자연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바다, 숲, 계곡이 주는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다. 우리는 과연 앞으로도 자연에 의해 행복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취미들도 영상 콘텐츠만큼 빠르게 자극적으로 변하진 않는다. 우리는 과연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즐거울 수 있을까. 우리의 역치는 얼마나 무거워진 상태일까.
요즘 취미가 없거나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물론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겠지만, 어쩌면 이러한 영상 콘텐츠의 영향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분들에게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여쭤보면 대부분 그냥 누워서 유튜브나 넷플릭스 본다고 하신다. 몇 번의 터치만으로 너무나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시간과 체력과 돈을 소모하면서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거나 지속하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취미가 주는 쾌락은 점점 영상 콘텐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질 것이다. 물론 취미활동이 주는 가치는 단순히 쾌락으로만 계산되진 않겠지만, 도파민이 사람의 의욕과 지속성을 자극하는 가장 기본적인 호르몬이라는 관점에서, 높아진 역치의 상태로 과연 탐구의 인내를 감내할 수 있을까.
저번 독서모임에서 사람들이 왜 반응 영상(reactor들이 어떤 영상을 보면서 반응하는 영상)을 보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었다. 나는 아마 불안감 때문일 거라고 대답했다. 알랭 드 보통이 <불안>에서 얘기한 것처럼, 넘쳐나는 콘텐츠의 자유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정말 좋은 건지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안정감을 얻는 것 같다고. 하지만 어쩌면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뉴스 기사를 읽을 때 댓글을 같이 읽는 사람의 비중이 88%다. 게다가 27%의 사람들은 뉴스를 보기 전에 댓글을 먼저 읽는다. 잇따른 안 좋은 사건들로 인해 네이버에서 뉴스, 연애, 스포츠 분야의 댓글을 제한하자 조회수가 급감하기도 했다. 어쩌면 사람들의 역치가 높아져서, 경험 그 자체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텐츠만으로는 부족해서, 댓글 반응과 영상 반응까지 모두 보고 나서야 만족이 되는 게 아닐까. 그들은 과연, 반응이 달리지 않는 일상의 경험에서 자연스러운 충족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SNS는 그런 일상에 반응을 붙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더 걱정이 되는 건 어린 친구들이다. 콘텐츠 폭발 시기 이전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즐겼던 것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는 남아, 이를 다시 꺼내 먹으며 향유할 순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충분히 해보지 못한 채, 우리 사회가 한껏 올려둔 콘텐츠의 자극을 첫 자극으로 겪게 되는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에게 일상의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잔잔하고 나른한 행복이란 걸 느낄 수 있을까. 외부의 의존 없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행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