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연말 회고록

by 리타

매년 연말 회고록을 쓸 때가 되면 희미한 연초와 선명한 연말의 기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시작한다. 이번에 유독 그 균형추가 더 기울어지게 느껴지는 건 올해가 유독 길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말이 그만큼 짙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일단 희미한 연초에 다시 색을 입히며 연말 회고를 시작해 본다.


이번 상반기가 희미한 이유 중 하나는 그만큼 정신없이 지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가장 큰돈이 들어가는 것들을 바꿨다. 5년 만에 폰을 바꾸고, 이사를 하고, 새 차를 샀다. 유동성이 마른다는 표현이 경제 뉴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내 삶에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내 자금 상황에 맞지 않게 무리하게 큰 지출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양한 자산에 분산되어 있던 돈을 만기와 경직도에 따라 세세하게 조정해서 현금 흐름이 매끄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경험을 했다. 솔직히 재밌었다. 내가 가진 상황을 분석하고, 해야 할 목표를 정리한 다음, 최적의 답을 찾아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 마치 퍼즐을 푸는 것 같았다. 이는 돈뿐만이 아니었다. 이사와 새 차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내가 가진 한계를 확인하고 선택을 내릴 기준을 세우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이때 단순히 ‘좋은 것’을 떠나 ‘내게 좋은 것’이라는 나만의 정답을 찾아, 누군가 ‘왜 이런 선택을 했어?’라고 물어봤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하며 뿌듯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나가는 여정이 흥미로웠다. 잔고 상황이 정말 위태했던 순간도 있고 중간에 몸살이 한번 나기도 했지만 완성하고 나니 뿌듯한 상반기였다.


하반기에는 더 큰 변화가 있었다. 연애를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글에서 사랑이나 연애에 관련된 내용을 거의 쓴 적 없다. 사생활이나 개인정보의 문제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쓰고 싶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제3자처럼 내다보고 분석하는 걸 잘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삶에 걸쳐서 계속 내가 변화해야 할 부분을 판단하고, 이를 고쳐나가는 작업을 해왔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첫 번째는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 쉽게 말해 공부 잘하는 것이었다. 당시 모든 어른들이 그것을 바라왔고, 나 또한 이를 해내어 칭찬과 우러름을 받는 걸 좋아했었다. 그렇게 특목고도 들어가고 좋은 대학교도 들어갔다. 그렇게 자라면서 느낀 점이, 나는 타고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어머니가 ‘아들이니 키우지 손주면 못 키운다’라고 하실 정도로 짓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이 둘이 합쳐지니 악의는 없었어도 선을 넘는 상황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걸 다음 목표로 삼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 인지적으로 생각하고 추론하는 연습을 하고, 책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자 했다. 또한 선을 아슬하게 지킬 자신이 없다면 아예 안전하게 하고자 하여, 내 행동이나 말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의식적으로 계속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가치관 개선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아직도 내 성정이 완벽히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근 들어서 ‘선하다’라는 낯간지러운 표현도 들었을 정도면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마주친 난관.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들은 실패의 피드백이, 물론 겉치레로 하는 멘트일 수도 있지만, 좋은/따듯한/착한 사람이지만 이성적인 매력을 못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초에 ‘이성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정했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내가 했던 모든 도전 중 가장 난감했다. 공부는 뚜렷한 정답이 정해져 있는 과정이다. 가치관은 책과 미디어, 그리고 다양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방향성을 다듬어나갈 수 있었다. 취업 또한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바탕으로 비교적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정답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서슴없이 나눌 수 있는 주제도 아니고, 쌓아온 것도 없으니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그 과정이 힘들었는지, 오랜만에 내 감정을 소재로 한 시도 썼다. 처음으로 문학적인 글을 썼던 게 고등학교 때 힘든 감정을 시를 쓰면서 풀었던 건데, 그 시절 생각도 조금 났다.



빈집의 살림꾼


피부에 닿은 외부의 자극이 소란해서

눕지도 못해 웅크려 있었던 새벽 세시


내려앉은 외로움이 서서히 잠식했다

침수될까 두려워서 황급히 불을 켰다

쌓아뒀던 설거지가 눈앞에 들어왔다


부딪히는 그릇과 부서지는 수돗물의 소리에

나에 대한 혐오가 귀찮음과 투정으로 변했다

그날부터 일부러 설거지를 쌓아두고 미뤘다


말끔한 싱크대 비워진 휴지통

깨끗한 방바닥 반짝인 화장실

해치운 집안일 성실한 살림꾼

그래도 남겨진 심연의 사무침


왜 살림은 동사가 될 수 없는 걸까

왜 마음은 자가가 불가능한 걸까

왜 그들은 이사를 가버리는 걸까


그래도 톱니바퀴는 돌아가야지

그래도 다음 하루는 나아가야지

그래도 다시 한번은 믿어봐야지



아무튼,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어떻게든 이것저것 찾아보고 어떻게든 조언을 구해서 무엇이라도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나온 걸까. 아니면 어른들이 연애는 하는지 물어보실 때 종종 ‘연이 닿으면 하겠죠’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연이 닿은 것일까. 연말에 좋은 사람을 만났다.


연말에 있었던 또 하나의 큰 변곡점은 <드래곤 라자>였다. 예전부터 <드래곤 라자>를 매년 연말에 읽었다. 매번 의식적으로 읽으려 한 게 아니라 연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보통은 12월이 되면 생각이 나곤 했는데 올해는 10월에 생각이 났다. 그동안 <드래곤 라자>를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소설이라 말하고 다녔는데, 정작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막연한 느낌만 있을 뿐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읽었다. 덕분에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 현실과 낭만과 철학이 모두 독립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즉, 이들은 서로 대치되거나 유사성이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을 2^3=8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드래곤 라자>의 등장인물들은 이 부분에서 극과 극일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마주한 상황에 반응하는 서로 다른 관점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중 어느 하나도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이 이 책이 내 삶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이었다.


<드래곤 라자>는 주인공 선정부터 다른 장르 소설들과는 사뭇 다르다. 소설에서 1인칭으로 나오는 후치 네드발은 사실 딱히 뛰어난 능력이 없다. 특수한 장갑으로 인해 힘이 세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력이 가장 강한 건 아니다. 지략이 엄청 높은 것도 아니고 마법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지위나 재력도 없다. 성장의 감동을 보여주는 작품처럼 시작은 미약하지만 모험을 통해 엄청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뛰어난 능력치를 굳이 꼽아보라면 유머와 호기심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뛰어난 능력이나 잠재력이 있어서라기보단, 작가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그가 일행 중 1인칭으로 이 모험을 가장 흥미롭게 묘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처럼 상황을 멋지게 해결하는 키 플레이어처럼 묘사되진 않는다. 그리고 이는 다른 일행들에게도 모두 적용된다. 상황마다 약점이었던 인물이 해결책이 되기도 하고, 강점이었던 점들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마다 각기 다른 철학, 낭만, 현실의 성향이 각 상황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지면서 이들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시기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내 안에서 현실, 낭만, 철학의 균형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해준 것이다. 천진난만했던 소년에게는 철학을 통해 생각하는 삶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청년에게는 낭만을 통해 나아갈 길을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드래곤 라자>는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줬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몇 주 전 우연히 디지몬 관련된 콘텐츠를 봤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는 모두 선택받은 아이들이었다.’라는 문장을 봤다. 그 시절 봤던 디지몬, 포켓몬, 원피스 등의 만화나 판타지 소설은 모두 모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어떤 모험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멋지게 헤쳐 나갈 것이라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험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있다. 모험이란 무엇일까. 모험은 한자로 무릅쓸 모(冒)에 험할 험(險)을 사용한다. 즉 모험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진행보단 위기, 역경, 난관, 적을 만나고 이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2025년에도 월즈에서 우승하며 쓰리핏을 달성한 T1의 페이커 선수는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실 기록보다는 그냥 오늘 경기가 너무 재밌어서 그런 부분에서 만족하고요, 그리고 KT(상대 팀)가 오늘 또 워낙 잘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가지고 좋은 경기를 했다는 게 중요하고, 우승을 저희가 하기는 했지만 같이 경기해 준 KT한테 저는 더 감사함을 보내고 싶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페이커 선수는 “프로게이머는 성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팬분들께 경기 결과로 보답하겠다.”라는 말을 종종 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상대 팀과 같이 좋은 내용의 경기를 만들어 보여드리고자 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하고 있다. 최근에 읽었던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다.

무리를 감수하더라도 흐름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수를 선택하고 싶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해왔다. 실수가 있더라도 흐름을 지키는 쪽을 택했고, 때로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둬야 그림이 이어진다'는 마음으로 수를 놓았다. 냉정한 승부도 중요하지만, 나에게는 나만의 세계가 있었고 한 판의 대국 결과보다 장기적으로 내 세계가 발전하길 기대했다.
상대방이 허무한 실수를 하는 경우에도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같은 프로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아쉬운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수담을 나누었는가. 이 판에서의 수담은 이제 없다. 바둑에서 승패란 수담을 나누다 따라오는 하나의 부산물인데, 허무한 실수로 판이 끝나는 상황을 좋아하는 프로는 없다.

각자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두 프로 선수가 비슷한 말을 한다는 건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단순한 감상에 멈추지 않고, 내 삶에 적용해 보려 했다. 상대라는 것이 꼭 사람이나 존재일 필요는 없으니, 내가 내 난관을 상대할 때 승패에만 매몰되지 않고 좋은 과정과 그 안에서 내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지. 그러다 문제점을 발견했다. 오만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풀어나가면서 좋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갈 난관이 없다.


물론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걸 이룬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난관이라고 설정할 만한 부분은 시간과 운 외엔 크게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며 만족스럽고, 그동안 많은 고민과 준비를 쌓아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보통 나이가 드는 걸 싫어하지만, 나는 가끔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과 같은 삶이 적당한 운이 따라주면서 시간이 흐른다면 원하던 삶이 잘 꾸려져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느껴지면서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은 원인이 이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올해에도 말로는 재밌겠다 했지만 실제로 내가 그 상황이 되면 즐길 수 있을까 걱정했던 번지점프를 주저 없이 성공했고, 3km도 겨우 달리던 상황에서 우선 마라톤 대회를 신청한 뒤 악착같이 연습해서 10km를 한 시간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이런 도전을 계속했던 이유가 사실 새로운 경험과 성공 기억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난관을 원했던 게 아닐까.


그 원인이 <드래곤 라자>를 통해 알게 된, 철학과 낭만에 비해 현실이 부족한 내 상태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게 난관이 없었던 게 아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 난관은 오히려 시야를 너무 멀리 두게 하여 숲과 그 너머의 산 정상만 바라보느라, 정작 앞에 놓인 현실의 나무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잔가지에 생채기가 나더라도 ‘아무튼 앞으로 잘 갔으면 된 거지’하며 멀리만 보고 나아갔던 것 같다. 그래서 연말에는 철학과 낭만보다는 현실에 더 시야를 둬보려 했다.


결론은 냈지만 현실의 나무를 본다는 건 뭘까. 우선 차근차근 나를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일정, 자금, 체력 등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다시 점검하고 조율하며, 방향성만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던 것들을 검토했다. 기회와 기한 사이를 고민하며 속도를 조절하고 틈을 내어 여유를 만들려 했다. 그동안 글쓰기에 소홀했던 것에, 물론 다른 이유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이 원인도 있었다는 변명을 해본다. 그동안 내게 글 소재가 되어준 것들은 대부분 철학이나 낭만에서 기인한 생각이나 경험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기인한 시간에는, 글이 되기 어렵거나 글로 쓰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글 쓰는 거 어렵지 않아. 그냥 평소에 드는 생각들 정리하기만 하면 돼.’라고 쉽게 말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조금씩 생각의 조각들이 나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하나의 글이 만들어질 정도로 충분히 연결되진 못 했던 것 같다. (사실 이 회고록에 많이 녹였다)


아무튼, 그렇게 현실을 살아내며 2025년을 마무리했다. 연말부터 시작해서 균형추를 옮겨보려 했지만 아직도 약간 철학과 낭만의 비율이 높은 것 같긴 하다. 그래서 2026년도 아마 이 균형을 맞추는 데 더 집중하는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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