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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Feb 21. 2023

이사하면서 느낀 모순

이사를 했다. 요즘 금리와 물가를 보면 이사하기 좋은 시기는 아닌 것 같지만, 지난달에 갑자기 사무실 위치가 바뀌게 되어서 이사를 했다. 이사 자체는 귀찮은 일이지만 새 집이라는 개념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만들고 설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겐 새 집이 생겼다는 것은 새 도화지가 생겼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계약을 하자마자 줄자를 들고 이사할 집에 찾아가 온갖 크기를 쟀고, 그대로 프로그램에 옮겨 2~3주 동안 가구 배치와 인테리어에 대해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했다. 또한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는 것도 여러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가령 내가 이사를 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자주 다니는 길에 교차로와 신호등이 있을 때, 어떤 순서로 건너야 타이밍이 딱딱 맞을지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소하지만 실제로 살지 않으면 몰랐을 요소 하나하나를 발견하는 게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듯한 재미를 준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느꼈던 점은 사람은 참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처음 집 계약할 때부터 그랬다. 원래 결정을 할 때 신중한 편이다. 사실 좋게 포장해서 신중함이지 불편한 요소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게으른 완벽주의자이다. 하지만 이번 이사 결정은 신기하게도 빠르게 진행됐다. 이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일주일 만에 맘에 드는 곳이 생겨서 가계약을 걸었고, 지금 살던 집도 내놓고 하루 만에 바로 계약이 됐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돼서 대출과 이사까지 모두 완료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대부분의 일에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정작 큰 결정들은 의외로 금방 결정된 게 많다. 진로를 코딩으로 바꾼 거라던가, 대학원 인턴을 하다가 갑자기 군대를 간 일이라던가. 작은 일들은 미뤄도 큰 문제가 없어서 최대한 완벽을 기하려고 하지만 큰일들은 보통 타이밍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짐을 포장할 때도 모순인 모습을 발견했다. 직선처럼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인테리어에서도 미니멀리스트처럼 딱 필요한 것만 깔끔하게 있는 것을 좋아한다. 실제로 이사 가기 전 집을 봐도 이것저것 많이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 박스 10개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짐을 박스에 담아보니 큰 오산인 것을 깨달았다. 예상보다 두 배나 되는 짐이 혼자 사는 원룸에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필요한 것만 깔끔하게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만 깔끔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였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만큼 정리를 잘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새 집에서도 짐을 정리하고 나니 그 많던 짐이 다 어디 들어갔지 할 정도로 공간을 알차게 썼다. 다시 보니 굳이 필요 없는 것은 잘 안 사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술이란 키워드에 예민한 공대생이다 보니 삶을 편하게 해주는 아이템이라고 하면 쉽게 지갑이 열리는 편인 것 같다.


스카이라인 선 정리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면서도 모순인 나를 느꼈다. 위에서 나를 표현한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에서 앞의 형용사처럼 게으른 편이다. 특히나 청소를 정말 안 좋아한다. 오죽하면 작년에 잘 산 물건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게 로봇청소기이다. 하지만 가끔씩 정리에 강박이 생길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언젠가부터 선 정리에 진심이 됐다. 특히 앞에서 봤을 때 선이 책상 위나 바닥에 흩트려져 있으면 어딘가 불편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선 정리 습관으론 모니터 뒤 안 보이는 높이에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편이다. 이번에 데스크톱을 설치하면서도 선 정리에만 30분을 쓴 것 같다. 그 외에도 분류해서 정리해두는 것은 열심히 하는 편이다. 생각해 보면 한 번만 제대로 해두면 지속 가능한 것에는 열심히 하는 편인 것 같다. 선 정리도 그렇고 분류해서 정리하는 것도 한번 해두면 다음에는 불편해서라도 다른 칸에 못 두니 지속력이 꽤 좋다. 하지만, 특히 바닥 먼지 청소처럼 열심히 해도 어차피 나중에 또 해야 되는 것들에는 의욕이 잘 나지 않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렇게 모순적인 나 자신이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괜찮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일관적이고 예상대로인 것보다 나 자신도 나를 모를 정도로 모순적이어야 삶이 재밌는 것 같다. 물론 모순도 모순 나름이다. 내로남불처럼 남에게 강요하는 기준보다 나 자신에게 허용하는 기준이 차이가 나는 모순은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안에서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나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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