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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Oct 14. 2023

사이코패스의 글쓰기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연휴 때 뵌 외할머니의 수척해지신 모습 이야기를 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머리로는 슬픈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통화하던 복도에 거울이 있어서 내 표정을 봤는데 태연한 무표정이었다. 내 공감 능력에 이상이 있다는 걸 처음 자각한 건 할머니 장례식 때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친척분들도 다들 슬퍼하시며 어떤 분들은 오열하시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냥 눈물이 메말랐나 보다, 수학을 좋아하는 이과생이다 보니 논리를 중요하게 따지느라 이렇게 됐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최근에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라 말하고 다니는 제임스 펠런이라는 뇌신경 과학자가 쓴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를 읽었다. 그는 수십 명의 사이코패스 살인자들의 뇌 스캔 사진을 분석하고 연구하여 패턴을 발견했다. 사이코패스들의 뇌에서 활동이 소실된 부분은 변연피질로 주로 감정과 관련된 부분을 처리해서 감정피질이라고도 한다. 그 안에 있는 안와피질이 흔히 말하는 공감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감정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인지적 공감을 마음 이론이라 표현했는데, 감정적 공감은 남들의 고통에 대한 기초적인 연대감이고, 인지적 공감은 다른 사람의 사고와 믿음을 나와 다를지라도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가령 자폐장애 환자는 감정적 공감 능력은 있지만 인지적 공감은 부족한 반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적 공감 능력은 없지만 인지적 공감은 가능하다. 따라서 사이코패스도 남들에게 동정은 할 수 있는데, 동정이란 다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는 사고와 그 사람을 도우려는 의지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을 느끼진 못할 뿐이다. 예를 들어 지인의 장례식에 가는 것도, 자신도 덩달아 슬퍼져서 애도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슬픈 상황임을 인지하고 도움이 될 생각으로 가는 것이다.


다시 제임스 팰런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는 이렇게 분석한 결과를 논문으로 제출한 뒤 다음 연구인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 스캔 사진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때 이전에 봤던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패턴이 나타난 사진이 하나 들어있었다. 책상 정리를 하다가 사진이 잘못 끼어 들어간 줄 알고 이 사진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충격적이게도 정상인 대조군을 위해 넣었던 자신의 뇌 사진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했지만 자신의 뇌가 정확히 사이코패스의 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충동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고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자신과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연구하고, 세 다리 이론을 도출해냈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에게는 위에서 말한 뇌 기능 장애, 흔히 전사 유전자라고 불리며 공격적인 성향을 만드는 MAOA 유전자, 그리고 어릴 적 아동 학대를 겪은 경험이라는 세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아이가 이런 사이코패스의 징후가 있는지 대부분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제임스 팰런의 부모님도 어릴 때 아이의 이런 성향을 알고 공감 능력을 기르기 위해 다양한 체험을 해주려 노력했다고 한다. 감정적 공감은 선천적인 영역이지만 가정 환경과 교육을 통해 인지적 공감 능력을 기른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뒤 본가에 내려가 부모님과 누나에게 책 내용을 설명하면서 내가 어릴 때 이런 징후가 있었는지 물어봤다. 어머니는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까지는 떠오르진 않았지만 심하게 이기적이고 장난이 지나쳐서 이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셨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어린 시절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누나 또한 어릴 때 내게 당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어릴 때 지독했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은 역변했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좋은 가족들과 주변 환경을 만나 인지적 공감 능력을 길러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올바른 삶과 가치관에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에도 이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예전에 사이코패스인 주인공을 다룬 정유정 작가의 소설 <종의 기원>으로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책의 제목이 왜 <종의 기원>이었을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많은 분들이 정확한 의도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책을 읽자마자 바로 알았었다. 같은 제목을 가진 다윈의 <종의 기원>은 생명의 진화와 자연선택설에 대한 이야기다. 자연 선택설은 자연계에서 여러 변이 중 환경이 더 적합한 종만 살아남으면서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이론이다. 즉 자연에 살아남기 힘든 변이들은 도태되어 사라진다. 사이코패스도 마찬가지다. 공감 능력의 부족은 현대 사회에서 맞지 않기 때문에 자칫하면 도태된다. 가끔씩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으면 이상한 감정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게 선행과 친절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이 아니라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생존 본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성향이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글쓰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상욱 교수님은 알쓸신잡에서 작가는 인간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김영하 작가님을 보니 하루 종일 사람을 관찰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내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상호작용이 없는 한 움직이는 돌덩이와 다를 바 없다. 이슬아 작가는 주어가 나뿐인 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회사에서 법정 필수 교육으로 직장 내 폭력에 관한 교육이 있었다. 실제 사례를 각색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진행자께서 "아이고 얼마나 힘드셨을까요"라는 말을 했을 때 깨달았다. 나는 지독히도 남에게 관심이 없이 내 생각만 하는구나. 일상에서 글의 조각들을 모으다가 한 주제로 뭉쳐지면 글을 쓰는 편인데, 남에게 시작해서 남에게 끝나는 이야기는 내게 조각으로 남지 못한다. 어떻게든 나를 거쳐서 내게 영향을 줘야만 내 생각에 머무른다. 그러다 보니 소설을 연습하기 위해 쓴 것 외의 모든 글의 주어가 나다. 감정적 공감을 못 해서 인지적 공감을 길렀던 것처럼, 이것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훈련해야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주변 관찰 일기 같은 걸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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