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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Oct 21. 2023

잊었던 꿈을 찾았다

다음 주면 내 차가 생긴다. 차를 새로 산 건 아니고, 아버지가 차를 사셔서 원래 타시던 헌 차를 물려받는다. 원래는 내년 초쯤에 받을 예정이었다. 계속 미뤄지는 출고 일정에 다른 차를 주문하셨는데 이 차는 주문하자마자 금방 나온다 해서 갑자기 차가 생기게 됐다. 다행히 운전 연습은 두세 달 전쯤부터 하고 있었다. 쏘카를 빌려서 봉사활동 갈 때 운전해서도 가보고 추석 때 큰집에 갈 때도 직접 운전해서 가봤다. 다들 2종 따도 상관없다고 할 때 굳이 스틱 트럭을 몰면서 1종을 따놓고도 신분증 스페어의 역할만 했던 면허가 5년 만에 드디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받을 차는 무려 아이폰이 처음 세상에 등장하기보다도 2년 전인 2005년에 나온 차다. 이제는 잘 안 보이는 초록색 번호판을 달고 26만 km의 주행거리를 달린 차는 세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요즘 차에는 옵션 축에도 못 드는 후방카메라 따위는 없다. 블루투스 연결도 당연히 안 되고 대신 CD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자세히 보다가 발견했는데 시가 라이터와 재떨이 칸도 그대로 있는, 그 시절의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차였다. 한마디로 낡았다. 창문을 손잡이 돌려서 열지 않아도 되는 게 천만다행이다.


슬슬 받을 시기가 다가오니 차량 용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렇게 하얀 도화지에 내 선택을 색칠하는 시간이 너무 좋다. 이사할 때도 집 분위기를 설계하고, 가구와 소품들을 고르고 배치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현관 쪽에 둔 디퓨저의 리드 스틱이 깃털 장식으로 되어있어서 구둣주걱을 새 모양으로 고를 정도로 사소한 물품 하나에도 최대한 선택의 의미를 담으려 한다. 미적 감성을 채워주거나, 자동으로 봉투를 묶어주는 쓰레기통처럼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최신 기술이 있거나, 아니면 크기가 배치 설계에 딱 맞아서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들어줘야 한다. 최근에 자취방에 놀러 온 지인이 인테리어에 공들였다는 게 확 느껴진다고 해줬는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차라 사야 될 게 많았다. 후방 카메라도 달아야 하고 내비를 보기 위해 스마트폰 거치대도 사야 하고 차에 연결해서 음악을 듣기 위해 블루투스 리시버도 사야 했다. 주차 번호판도 새로 사야 했는데 여기서 고민을 많이 했다. 워낙 작고 간단한 소품이라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있어서 쉽게 고르기 어려웠다. 언제나 옳은 고양이 감성으로 할까. 자동차라는 무드에 맞는 시크한 메탈로 할까. 아니면 개발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키보드 자판 디자인으로 할까. 디자인뿐만 아니라 안심 번호 서비스라든지, 손쉬운 번호 교체라든지, 밤을 위한 야광 효과 등 생각보다 자잘한 기능들을 서로서로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한 제품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아 잠깐 멍하니 있었다. 다른 제품들을 더 둘러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바로 주문을 했다. 감성을 자극하는 디자인의 제품은 아니었다. 운전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편의성이 들어간 제품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가치를 하나 품고 있었다. 이 제품에는 두 가지 기능이 들어있는데, 비상탈출 망치와 벨트 절단기였다.


안전용품은 따로 사고 주차 번호판은 더 이쁜 걸로 사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긴 했다. 곧바로 주차 번호판이야말로 이러한 안전기능을 담기에 최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기능들이 필요할 땐 정말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일 것이다. 과연 서랍에 넣어둔 도구를 뚜껑 열고 찾아 꺼내서 사용할 정신이 있을까. 그렇다고 항상 손에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에 놓기에는 거의 사용할 일 없는, 오히려 한 번도 쓸 일이 없어야 되는 물품이라 그 좋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너무 낭비다. 그래서 손 뻗으면 바로 집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항상 놓아둬야 하는 주차 번호판이야말로 이 기능을 품고 있기에 정말 완벽하기 그지없는 용품이라 할 수 있다.


감성과 편의에만 집중하다가 안전을 간과할 뻔했다. 간과라는 단어는 멀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기에 정말 어려운 단어인 것 같다. 까딱하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 이런 것들에 집중해야 내가 바뀌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두가 어떻게 하면 더 이쁜 주차 번호판을 만들까, 더 편리한 주차 번호판을 만들까만 고민했을 때 어떻게 하면 주차 번호판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아닐까.


대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에도 토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다. 이번엔 또 어떤 것을 만들어볼지 탐색하며 다녔는데 주로 찾던 소재는 내 친구들이 잘 쓸만한 것, 혹은 많은 사람들이 잘 쓸만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코엑스에서 열린 World IT Show를 관람하러 갔다. 한 부스에서 발견한 제품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걸이처럼 목에 거는 제품이었는데, 주변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 방향에서 진동이 울리는 기능이 있었다. 이 제품은 청각장애인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소음에 반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때 꿈이 하나 생겼다. 이미 편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더 편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고 돕는 것을 개발하고 싶다고. 하지만 대학 생활을 하고 군대를 갔다 오면서 이 꿈은 점점 잊혀졌고, 결국 취업할 땐 내 실력과 성장, 복지와 급여만 고려하며 회사를 골랐다.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라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자국만 남아 가끔씩 봉사활동을 하는 게 전부였다. 주차 번호판 덕분에 잊었던 꿈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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