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타 Oct 22. 2023

첫 달리기와 후회


처음에 런닝이라고 썼다가, 찾아보니 러닝이 올바른 표현이라 하여 러닝이라 했다가, 러닝 하면 왠지 learning이 먼저 생각나서 돌고 돌아 우리말로 달리기. 아무튼 처음으로 제대로 달리기를 해봤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서 글 쓰는 사람들이 산책과 달리기를 많이 추천한다. 관심은 있었지만 자취방을 구할 때 인프라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찾다 보니 주변에 적당히 걷거나 뛰기에 좋은 장소가 없었다. 라는 핑계를 대며 치일 피일 미뤄왔다. 더군다나 유산소라는 의미도 펌프라는 좋은 대체재가 있어서 이 정도면 괜찮지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얼마 전부터 폄프라는 핑계의 방파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처음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을 땐 2~3코인, 한 코인에 3판이니 6~9판 정도 하면 지쳐서 집에 왔다. 숨이 차고 땀이 쫙 나니 아 열심히 잘 했다 하며 뿌듯하게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성장하는 동물인가 보다. 꾸준히 하다 보니 체력이 늘었다. 한판 더, 한판 더 가능해지더니 이제는 5코인을 해도 체력이 남는다. 요즘은 숨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다리가 먼저 아파서 집에 온다. 다른 유산소 수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러닝머신은 뭔가 싫다. 이유를 더 파고들어 생각해 보면 이유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냥 싫다. 마침 주변에서 달리기 인증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팀에서도 다들 달리기를 시작해서 스몰토크의 한 칸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진짜 달리기를 해볼 때가 왔다.


집 바로 근처에는 뛸만한 곳이 없다. 그나마 가까운 곳이 양재천이다. 아주 멀었으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 애매하게 가깝듯 멀다. 달리기를 하고 돌아올 땐 땀이 쫙 난 상태일 거라 대중교통을 타지 못한다. 주변에 물어보니 거리가 조금 있으면 주로 자전거를 타고 쿨다운하면서 온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사는 지역이 강남 쪽이다. 작년 호우 때 유명한 제네시스 짤이 생겼을 정도로 경사 심하다. 양재천에서 집에 오는 길에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왔다 갔다 한다. 내리막길을 저항 없이 내려가는 것은 신나겠지만 달리기를 하고 난 체력에서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오를 자신은 없다. 그냥 걷기로 했다. 달리기를 하러 5km를 왔다 갔다 걷는다. 배만큼 배꼽이 커진 것 같지만 이것도 하나의 운동이 될 테니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하고 나면 뭔가 감흥이 있을 줄 알았다. 머릿속이 싹 정리가 된다든지, 주변의 평화로운 사람들과 풍경을 보면 뭔가 떠오른다든지, 내 안의 모든 숨을 내뱉고 나면 느껴지는 게 있다든지. 현실에 그런 건 없었다. 코스에 쓰인 미터수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을 거 같다'랑 '집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만 머릿속을 뒤덮었다. TMI로 변명을 하자면 올해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중등도 폐쇄성 폐 질환이 나왔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다행히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숨 쉬는 관련 모든 지표가 정상인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명치와 윗배가 동시에 아프면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 목표는 5km를 뛰는 거였는데 1km를 뛰었을 때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서 3km로 마무리했다. 그마저도 마지막 1km는 결국 걷다 뛰다를 반복하면서 도착했다.


해상도가 떨어진 시야로 생각 없이 걷다가 나오는 길도 잘못 들었다. 어찌저찌 가까운 편의점에 겨우겨우 도착해서 커피 한 캔을 마시니 슬슬 정신이 돌이와 기록을 봤다. 원래는 중간중간 체크하면서 페이스 조절도 하려는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그만 달리고 쉬고 싶은 걸 참는 데 모든 신경을 소모했다. 탈진할 정도로 힘들었던 것치곤 생각보단 잘 달렸다. 동시에 후회가 들었다. 원래 5km를 30분 안에 달리는 게 첫 목표였다. 3km를 16분에 달렸으니 나머지 2km를 3/4 정도 페이스로 14분에만 어떻게든 들어왔으면 성공했을 텐데, 너무 쉽게 포기한 게 아니었을까. 뿌듯함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움이 더 크게 남은 첫 달리기였다.


순간 이전에 <고양이와 이해>라는 글에서 역지사지에 대해 썼던 게 생각났다. 진정한 역지사지란 상대방의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라는 사람 그 자체를 보며 느껴봐야 한다고. 어쩌면 이렇게 역지사지를 잘못 사용했을 때 후회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새 3km와 16분이라는 수치만 보고 당시의 나를 판단하고 있었다. 분명 나는 죽을 것 같았다. 지금에야 머리가 차분해진 상태에서 분석했지만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 하면 3km 16분을 보고서도 2km를 더 뛴다는 생각은 절대로 못했을 것 같다. 애초에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바로 10분 전의 나 자신이었음에도, 어째서 당시의 감정은 쉽사리 무시된 채 숫자의 나열들만 눈에 들어오고 판단했을까.


'T발 C야'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됐을 땐 요즘 사회가 너무 공감을 강요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분은 '누칼협'이라는 말을 듣고 요즘 사회가 너무 공감이 부족하다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신조어가 딱히 사회를 대변하기보단 다양한 상황과 인간 군상을 더 와닿게 표현하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번 글에서는 '졌지만 잘 싸웠다'의 줄임말인 '졌잘싸'가 필요한 것 같다. 관인엄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해도 과거의 나를 너무 매몰차게 매도한 게 아니었을까. 반성과 후회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훈수는 실전보다 쉽다. 목표가 실패했다고 내가 실패인 것은 아니다. 난 분명 그 상황에서, 내가 처리 가능한 정보와 정신 상태에서 최선의 판단을 했다. 이번에 3km를 16분에 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천천히라도 1km를 더 달려서 4km만 달성해 보자.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p.s. 달리기를 하고 나서 글이 하나 나왔으니 결론적으로 아무튼 글쓰기에 도움은 된 걸까.

작가의 이전글 잊었던 꿈을 찾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