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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Nov 02. 2023

일도 취미도 아닌 무언가

바쁘다. 슬슬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정말 바쁘다. 회사 일이 바빠진 영향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경험과 도전이라는 명분으로 너무 많은 일들을 벌려놔서 슬슬 갈무리를 해야 한다. 근데 겨울 시즌이 왔으니 뜨개질도 시작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온 힘과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니고 하나씩 살펴보면 조금씩만 하는데 워낙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꽉 찬다. 대학교 때 교수님이 "이 정도는 일주일이면 할만하지요?"라시면서 마치 학생들이 수업만 듣는 것처럼 과제 양을 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했었는데, 어느새 내가 나 자신에게 그러고 있다.


이런저런 취미생활을 하다가 취미의 범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전시나 연극을 보는 것은 취미다. 보드게임이나 드럼도 확실히 취미다. 덕질과 콘서트 역시 당연히 취미다. 그렇다면 애매한 것들은 무엇일까.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 뜨개질, 토이 프로젝트가 과연 취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창작 활동들, 특히 결과물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들에 대해 어쩌면 취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분류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차이는 활동의 목적인 것 같다. 취미의 목적은 즐거움이다. 재미있거나 흥미롭거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들. 창작 활동은 조금 다르다. 항상 즐겁지만은 않다. 참 이상한 감정인데,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창작활동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실현이다. 내 머릿속에만 있던 것들을 현실로 꺼내는 것. 내 생각이 담긴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것. 재미보다는 오히려 귀찮을 때도 있고 돈을 벌기는커녕 꾸준히 잡아먹고 있음에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 단 하나로 계속하고 있다.


취미가 아닌 건 확실한데 그렇다고 일이라고 보기에도 조금 다르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퇴근하고도 이것저것 많이 한다고 하면 N잡러가 되기에 딱이라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다고 N잡러가 될 생각은 없다. 이 얘기를 하면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겠지만, 내게 일이란 받는 만큼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여기서 책임의 대상은 회사가 될 수도 있고 손님이나 사용자가 될 수도 있다. 받는 것도 임금이나 복지일 수도 있고 인정이나 기대, 인간관계 등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어찌 되었건 외부에서 내게 들어오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실현 활동의 책임은 이와 방향이 정반대다. 내 안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에 대한 책임이다. 무엇을 왜 만드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뜻과 가치관을 담고 있는지. 이에 대해 고민을 하고 결과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어떤 거래의 개념으로 상대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하고 그 영향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실현 활동에서의 책임이다.


최근에 식단 조절을 시작하면서 간식류를 전혀 안 먹고 있다. 회사에서 티타임을 할 때도 가운데 꺼내둔 빵이나 초콜릿 등을 하나도 손을 안 대고 커피만 마신다. 팀원분이 '나중에 칵테일바 차리려면 다양한 맛을 알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설계한 칵테일 바는 많은 손님들을 만족시킬 생각이 없다. 내가 생각과 이야기를 담은 공간과 창작 칵테일을 제공할 뿐이다.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고 별로라면 다음부터 안 오셔도 괜찮다. 다른 건 상관없다. 틀리지만 않으면 된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겠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요즘은 토이 프로젝트를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 변명을 하자면 그래서 글 쓰는 게 점점 미뤄지고 있다. 다음 주까지 최소 컨셉 기능만 구현해서 베타테스트를 시작하고, 올해 안에 기초 기능들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만드는 거야 어떻게든 잠을 줄여서라도 될 것 같은데 베타테스터를 구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아래 사용자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책을 종종 읽는 편이고,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사람

2. 1번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이것만 봐도 정말 돈 벌 생각 없이 그냥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내겐 사업가의 소질은 없다. 아무튼. 일단 같이 독서모임을 하는/했던 사람들께 부탁해 볼 생각인데 흥미가 있으실지 잘 모르겠다. 프로젝트 자체도 과연 내 생각만큼 효과를 낼지 걱정이다. 시간도 많이 뺏고, 서버 유지비도 들고, 사람 구하기도 힘든데 걱정까지 하면서 왜 만드냐 하면 그냥 만들고 싶어서다. 이런 서비스를 만들어 보고 싶고 나를 비롯해서 잘 맞는 사람들에겐 긍정정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일단 만든다. 일도 취미도 아닌 무언가 덕분에 바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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