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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ul 29. 2023

고양이와 이해

시큰둥하다가도 한 문장, 혹은 한 문단에 갑자기 마음이 확 꽂히는 경우가 있다. 어린이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정확히는 논리적, 건설적인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여기에 속했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러울 때도 많지만 그들의 세계에 끼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그래서 전에 독서모임에서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이 선정되었을 때 별로 흥미가 돋지 않았다. 책도 그냥 '그래 그렇구나' 하면서 설렁설렁 읽었다. 그러다가 정수리에 번개를 꽂는듯한 문단을 만났다. 그 문단에게 뒤통수에 망치를 한대 맞은 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처음부터 다시 책을 읽었다.


멀리 떨어진 사물의 크기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어린이는 어른보다 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 어른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위가 어린이 쪽이 더 좁다는 뜻이다. 어린이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통제불능이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탓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 살던 곳에 가 보면 동네가 '좁아' 보이는 것 역시 공간 감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다시피 해서 눈높이를 낮추어도 어린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볼 수는 없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참 좋아하는데 가끔 이 말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지사지는 내가 상대방의 상황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눈높이만 낮춘다고 아이가 보는 세상을 볼 수 없듯이, 그동안 살아온 배경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만 대입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상황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해 보려 해야 한다. 내가 최대한 아는, 혹은 그 정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상대방을 토대로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땠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정확한 역지사지라고 생각한다. 재밌게도 나는 마피아 계열 보드게임을 할 때 이 역지사지를 가장 잘 활용한다. 내가 아는 정보는 우선 배제한 채, 상대방이 접할 수 있는 정보만을 토대로 빙의해서 생각을 예측하고 설득해 보면 꽤나 잘 통한다. 그러나 현실은 보드게임과 다르다. 상대방이 가진 경험과 정보를 알기 어렵다. 완벽한 역지사지란 당연히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역지사지는 완벽히 이해할 순 없는 상대방에게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려는 용도로만 써야 한다. 상황만 보고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이 "야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라며 비판의 용도로 사용하는 게 역지사지를 가장 잘못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알려면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것을 경험해 보려 하고, 동시에 아직 경험해 보니 못한 것에 대해 짐작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장난으로 하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눈앞에 나타나면 어떨 것 같아요?"라는 말에도 "그 상황이 되어봐야 알 것 같아요."같은 재미없는 답변밖에 못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거대한 시련이 닥쳤다. 글쓰기 모임에서 '성별 바꿔서 일기 쓰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다.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혼자서 끙끙대보다가 전혀 감을 못 잡고 결국 동기들에게 간단히 몇 개 물어봤다. 덕분에 어느 정도 소재와 방향성은 잡았지만 여전히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써본 글 중 역대급으로 쓰기 어려운 글이었다. 차라리 자기소개서를 썼을 때가 더 쉬웠던 것 같다. 어려울 것을 예상하고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다행이지 겨우 1000자 조금 넘는 글을 쓰는 데 3주나 걸렸다. 다 쓰고서도 후련한 마음보단 혹시 내가 잘못 짐작하거나 넘겨짚은 부분이 있어서 불쾌함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계속 들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남을 대변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글쓰기였다.


제목에 써둔 고양이 얘기로 넘어오자면 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고양이 털 알러지가 있다. 고양이를 키우기엔 힘들어서 (알러지 약을 먹고) 고양이 카페를 간다. 다행인 점은 고양이들에게 사랑을 잘 받는 편이다. 고양이 카페를 가면 90% 이상의 확률로 무릎 위에 고양이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 비결에도 역지사지의 묘리가 숨어있다. 고양이들에게 간택 받기 위해서는 고양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고양이들은 귀차니즘이 강한 동물이다. 고양이들의 간택을 받기 위해서는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근처에 와도 호들갑 떨거나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 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고양이 카페에 갈 때 책을 가져가는 편이다. 한 시간 정도 무심히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다리 위에 올라와 몸을 웅크리는 고양이를 볼 수 있다. 이때부터는 쓰다듬어도 거부하지 않는다.


수많은 성공 사례로 증명된 비결


만약 좀 더 빠르게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다면 치트키가 있다. 다만 정말 철면피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사실 이론상으로만 생각했던 가설인데 얼마 전 친구네 고양이를 돌봐줄 일이 생겨서 실천해 봤다. 고양이는 근본적으로 맹수이고 사냥의 특성이 있다. 사냥에서 중요한 것은 고지를 점하는 것이다. 고양이들이 사람을 피하는 이유가 기본적으로 사람의 눈높이가 고양이보다 높아서인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냅다 누우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하기 어렵다. 바닥에 눕거나 엎드려서 고양이와 눈높이를 맞추면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경계하던 아이들이 눈높이를 맞추자 슬금슬금 다가왔다. 여기서도 먼저 손을 뻗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고양이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아이컨택 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내 코에 코를 부딪혀오는데 그러면 나도 살짝 부딪혀준다. 그렇게 몇 번 교감(?)을 하고 나면 이마를 내 머리나 어깨에 부빈다. 그러면 나도 옆구리에 머리를 부벼준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들이미는데, 찾아보니 고양이가 엉덩이를 들이민다는 것은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때부터는 일어나서 마음껏 쓰다듬어도 피하지 않는다. 다른 종족인 고양이를 이해하는 게 더 쉬운 걸 보면 사람은 참 복잡하고 오묘한 생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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