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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Aug 06. 2023

희미한 존재에게의 사랑

얼마 전 양귀자의 <모순>으로 독서모임을 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좋아하고 소설을 읽어도 로맨스 소설은 잘 안 읽어서 오랜만에 읽어보는 사랑 이야기였다. 소설의 주인공 안진진이 갈등하는 두 남자 김장우와 나영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둘의 MBTI는 무엇일까 얘기가 나왔다. 김장우는 INFP, 나영규는 ESTJ로 결론이 났다. 나도 INFP여서 그런지 갑자기 김장우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종종 하긴 했다. 놀러 갈 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 모습이나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모습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희미한 존재에게의 사랑이었다.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양귀자, <모순>


희미한 존재들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춘기의 반항심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희미한 것보다 특이한 것을 바라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주변의 것들을 추구하며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은, 흔히 말하는 홍대병의 마음. 시간이 지나 철이 들고 지금은 오히려 튀기보단 조용히 지나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희미한 존재들도 좋아한다. 예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반항심이라는 표현은 같을 수도 있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 전에는 특별함이나 독창성을 추구하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공정함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의 시스템에 저항하며 희미한 존재들을 바라본다.


사회에 처음 나와 취업 준비를 하다 보면 거대한 역설에 마주친다. 취업을 하려면 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경력이 있으려면 취업을 해야 한다. 도대체 신입은 어디서 어떻게 경력을 쌓아야 하는가. 이것이 내가 희미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이유다. 수많은 공급이 존재할 때 좋은 것들을 선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보통 경력, 리뷰, 조회수, 좋아요 등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참고해서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 선택받은 존재들은 더 많은 레퍼런스를 만들어낸다. 뚜렷한 존재들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희미한 존재들은 점점 더 희미해진다.


AI 기술이 발전하고 추천 시스템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추천 시스템의 기본적인 원리도 위에서 말한 레퍼런스와 비슷하다. 만약 내가 A, B, C라는 영화에 높은 별점을 줬다면, 비슷하게 A, B, C에 높은 별점을 준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높은 별점을 준 영화를 추천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잘 몰라서 아직 별점이 없는 영화들은 추천 대상이 될 수 없고, 추천 목록에 뜨지 않으니 사람들은 더욱 안 보게 된다. 학계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Cold Start Problem이라고 부르며 인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다. 그나마 선택을 하는 유저에 대한 데이터가 적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해결을 할 수 있다. 가입할 때 취향에 대한 질문을 받아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비슷한 유저를 찾아내면 된다. 하지만 선택을 받는 아이템에 대한 데이터가 적은 경우는 더욱 해결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여유 있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희미한 존재들을 바라보고 싶다.


주로 글을 읽을 때 이런 마음이 더 강한 것 같다. 브런치에서 글을 읽을 때 맞춤형 추천 글이나 요즘 뜨는 글을 보지 않는다. 그냥 최신순으로 정렬하고서 위에서부터 본다. 글을 읽을 시간은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되니 최대한 많은 작가분들의 글을 접해보려 한다. 책을 고를 때도 비슷하다. 베스트셀러 코너를 지나쳐 곧장 일반 서가로 간다. 전에 있었던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독립출판물 코너인 책마을부터 둘러보고,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다. 여기에는 팬으로서의 사심도 조금 있는 것 같다. 이미 유명하거나 베스트 셀러들은 내가 아니어도 충분한 사랑을 받기에, 어쩌면 더 응원이 필요한 분들께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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