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e New Walmart
그날의 치즈 냄새를 잊을 수 없다. 우리 가족의 첫 미국 슈퍼(월마트) 방문이었다. 이사한 동네는 인구의 99%가 백인인 곳으로,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는 시골이었다. 슈퍼에 가려면 무조건 차를 타고 15분은 가야 했다. 물리적 고립의 시작이었다.
내가 살던 일산 호수마을에서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상대적으로 꽤 자유로웠다. 길 건너 초등학교에 다녀온 뒤 피아노 학원을 가기 전, 엄마가 주신 500원으로 포켓몬 빵을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립심을 키웠던 나였다.
짧지만 내 아홉 살 인생의 전부였던 한국의 삶은, 예상외로 이 자유의 나라 미국보다 훨씬 독립적이었다. 한국에서는 학교, 슈퍼, 문방구, 학원 등 집 근처를 혼자 다닐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빡빡한 스케줄’ 안에서 오히려 자립심을 키워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동네의 지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혼자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며 느꼈던 뿌듯함, 부모님의 신뢰 속에서 학원을 혼자 다니던 성취감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때의 나는 세상에 맞추기보다 내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자립성을 긍정적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내 나이 고작 아홉 살이었지만.
새로운 미국 동네에서 슈퍼 가는 길은 꽤 한산했다. 저녁 7시,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고 길에는 차만 다녔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가요, 코요태가 차 안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 한국에서도 지겹게 들었던 노래였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자주 내려갔기에, 한국에서도 차를 자주 탔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도 차와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될 줄은 몰랐다. 신호등 불빛밖에 없는 어둡고 조용한 이 마을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경쾌하고 신나는 한국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듣는 우리 또한 이곳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신지 언니가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15분을 달려 도착한 월마트 슈퍼. 밝고 하얀 조명은 늘 어둡던 미국 집 내부와 너무 달랐다. 조명은 밝았지만, 점원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몸집은 내가 알던 한국 어른들보다 두 배는 커 보였고, 마치 ‘거인의 나라’에 들어온 듯했다.
스마일 배지를 달았지만 웃지 않는, 노란 조끼를 입은 키 큰 할아버지 점원은 문 앞에서 우리 가족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부모님 말씀대로, 우리가 이 마을의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라는 사실을.
노란 조끼의 할아버지 점원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무지에서 오는 걱정의 눈빛도 공존했다. 내가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봤을 때의 눈빛과 동일했다. 새롭기 때문에 알고 싶고, 나와는 너무 다르며, 그 생명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기에 일단 경계하는 눈빛. 할아버지 역시 인간 본능을 서슴없이 내보였다.
우리의 동의 없이 그는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미국 특유의 스몰토크 문화였다.
이 나라의 문화 차이는 거기서 시작됐다. 이유 없는 잡담과 그들만의 여유로운 친절 속에서 ‘빨리빨리’ 문화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 가족은 매번 지쳤다.
그는 대화를 시작하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질문이 앞으로 얼마나 지겹도록 평생 따라다닐 줄은.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아빠는 그 질문에 자랑스럽게 “코리아!”라고 답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곧장 그게 중국이냐, 일본이냐고 물었고, 아빠의 얼굴은 붉어졌다.
“낫 재팬! 낫 차이나! 네버!”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아홉 살 인생을 살면서 한국에서는 내가 이토록 선명히 ‘다르다’라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의 비교 대상은 한국 학교 친구들이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다름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오로지 공부 성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차이를 ‘다름’으로 느끼지 않았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쟁심 많고 질투심 많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다르다’는 감정을 정확히 느낀다는 것은 곧 내가 비교 대상보다 못났다고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공부 성적처럼 노력으로 바꾸거나 이겨낼 수 없는 것일 때 오는 절망감과 억울함은, 너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무거운 감정이었다.
할아버지라는 커다란 관문을 지나자 처음 보는 세상이 펼쳐졌다. 분명 동네 슈퍼였는데,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주말마다 자주 가던 대형마트만큼이나 컸다. 미국은 남는 게 땅뿐이라더니.
점원을 지나자 과일과 야채 코너가 펼쳐졌다.
“어머, 과일이 이렇게 싸다, 여보.”
고작 서른 살 남짓이던 젊은 엄마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겁이 없으셨던 젊은 시절의 부모님은 미국 사회 안에서도 고립된 작은 중부 시골 마을에, 아홉 살 딸과 다섯 살 아들을 데리고 용감히 태평양을 건너셨다. 서울 같은 도시가 아닌 지방 출신이셨던 부모님은 넉넉지 않았던 집안의 도움 없이 20대 중반에 당신들의 힘으로 서울에 상경하셨다. 그 시절 서울 상경도 흔치 않았다며, 엄마는 늘 자랑스럽게 아빠를 치켜세우셨다. 그런 우리가 글로벌 진출이라니! 그것도 세계 최고 나라라는 미국에! 아빠의 자수성가를 늘 자랑스럽게 여긴다.
훗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미국 이민행은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순리대로 따라 선택한 결과물이야. 깊게 생각한다고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옳은 선택이란 없어. 그 선택의 책임을 진다면, 그 행동이 옳은 거지.
부모님도 대륙의 슈퍼를 통해 새 문명을 마주하던 그 순간, 내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치즈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메리칸, 스위스, 블루치즈, 크림치즈, 고-우-다?
알 수 없는 모양과 형태의 치즈들이 유리 진열대 안에 영문 표지판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에서의 조기 교육 덕분에 영단어를 어렵지 않게 읽을 줄 알았다.
치즈 코너에서는 청소 후 마르지 않은 바닥의 락스 냄새와 뒤섞여, 치즈 특유의 꾸릿하고 불편한 냄새가 내 코끝을 진동했다.
미국 냄새였다.
그때 각인된 불편하지만 익숙해진 미국 냄새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치즈 진열대 너머의 점원은 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부모님이 쇼핑에 한눈을 파시던 중, 그 치즈 점원 아저씨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를 읽을 줄 안다고 뿌듯해하던 나는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듣던 영어가 아니었다. 한국의 영어 선생님 에이미보다 열 배는 빨리 말하는 것 같았다. 전혀 영어로 들리지도 않았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괴로움을 아홉 살에 알게 되었다. 학문에 나름 밝았던 나는 바보가 된 느낌이 매우 혐오스러웠다. 답답함을 넘어 두려웠다.
그는 내가 만난 두 번째 미국 사람이었다. 나는 그 치즈 아저씨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어린 나는 무서웠다. 너무나도 다르게 생긴 파란 눈과 금발의 아저씨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계속 말을 늘어놓자 곧바로 아빠를 찾아 뒤로 숨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 출장을 자주 다녔던 아빠는 여유로운 표정과 미소를 띠며 치즈 아저씨에게 친절히 답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했어, 아빠?
우리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어.
스마일 할아버지와 치즈 아저씨 이후에도, 아빠는 그 슈퍼 안에서만 그 질문을 다섯 번은 더 들으셨다.
이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가 왜 이렇게 궁금한 걸까? 어린 나는 매우 의아했다.
슈퍼 안 미국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지시키며, 우리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 계속 물었다.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걸까?
어린 나에게 가장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코리아’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나라를 아무도 모른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나라는 그 당시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나의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세계에 입성한 나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인 정체성을 조용히 삭제당했다.
열 살도 되기 전 내가 그날 배운 것은,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매우 작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작은 나라 출신의 동양인 아이였다. 무의식적으로 나를 그들보다 낮춰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나는 이곳에서 결코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여전히 그 불편한 치즈 냄새는 나의 ‘다름’을 상기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