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우리 가족의 첫 미국 집은 시골 마을에 하나뿐인 아파트였다. 남는 게 땅뿐인 한적한 중부 마을에서는 정말 가난하거나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주택에 살았다. 관광지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미국 아파트는 한국에서 살던 아파트와 매우 달랐다. 위로 대신 옆으로 넓었다. 2층 단위로 퍼져 있던 미국식 아파트는 들어서자마자 칙칙한 색깔의 카펫 바닥과 새로 덧칠한 페인트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미국 집은 원래 화장실 외에는 조명이 붙박이식이 아니어서, 처음 도착했을 땐 그 어둠이 너무 불편했다.
어두운 내부와 상반되게, 미국식 베란다인 발코니에 나오자마자 잔디를 밟을 수 있었고 주차장이 바로 보였다. 이사 후, 아홉 살의 내가 가장 먼저 눈이 간 곳은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였다. 크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익숙함을 찾고 있었다. 내가 찾는 걸 알았는지, 놀이터는 우리 집 발코니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
한국에서의 놀이터는 가족 외 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해 준 장소였다. 희한하게도 일산 집 앞 놀이터보다 대구 할머니 댁 앞 놀이터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나에게 늘 새로움과 설렘을 주던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 집의 아파트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가득했다. 대구에 한 달씩 내려가 있을 때면 매일 놀이터에 출근 도장을 찍듯 나갔다. 한국에서 나는 주로 모래놀이를 했다. 늘 할머니 손을 잡고 어린이용 모래놀이 키트를 들고 들뜬 마음으로 터벅터벅 놀이터로 걸어갔다.
키트에서 삽을 꺼내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그 모래가 바닷가 모래와 똑같은 줄 알았다. 하지만 바닷가 모래처럼 곱지 않아, 늘 놀이터 옆 약수터에서 물을 조금씩 길어와 흙의 질감을 묽게 만들었다. 디즈니 만화영화를 즐겨보던 유치원생의 나는 늘 궁전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두꺼비집을 만들곤 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할머니께 자랑했다.
나의 모래놀이는 항상 또래 친구들과 함께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네 친구들은 언제나 내 모래성 놀이를 흥미롭게 도와주곤 했다.
익숙함을 찾던 나는 미국에서도 혼자 두꺼비집을 만들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왼손으로 모래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모래를 둥글게 쌓고 있었다. 열심히 모래를 쌓고 두드리고 있던 중, 한 백인 여자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What are you doing?
미국에 온 지 한 달쯤 되던 나는 여전히 영어를 서툴러했다. 며칠째 혼자 놀던 놀이터에서 처음 말을 거는 아이를 보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Ummm… uhhh…
Is that a house?
그 말은 알아들었다. House! 내가 아는 단어였다. 그래서 기쁘게 대답했다.
Yes! House!
그리고 손짓으로 두꺼비집 만드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한참 같이 모래놀이를 하다가 목이 말라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인사 없이 집으로 향하는 나를 그 아이가 따라왔다. 조금은 당황했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가 싫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발코니 앞으로 왔을 때 아빠가 보였다. 나는 순간 친구를 의식하며 평생 처음으로 아빠의 호칭을 단숨에 바꿨다.
Father! Hello!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Dad나 Papa도 아닌 Father라니. 평생 친근하게 “아빠”라 부르다가 갑자기 “아버지”라고 바꿔 부른 셈이었다. 영어로 부르는 나를 본 아빠도 당황하셨는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셨다. 아빠는 발코니 너머 마당 잔디에 서 있던 나와 친구에게 오렌지주스를 건네주었다. 무더운 여름날이라 주스를 벌컥벌컥 마신 뒤, 우리는 다시 놀이터로 향했다.
다음 날도 새 친구 니콜과 함께 놀이터에서 두꺼비집을 만들었다. 미국에서의 첫여름은 그렇게 니콜과 함께 아파트 놀이터에서 보냈다.
그렇게 친구가 된 지 몇 주 후, 나는 니콜의 아파트 친구들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월마트에서 새로 산 붐박스(Boombox)와 그 시절 미국의 인기가요 모음 CD Now를 들고 놀이터에 나타났다.
내 예상대로 붐박스는 대히트였다. 놀이터의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영어도 서툰 내가 노래 가사를 흉내 내며 흥얼거리던 찰나, 니콜의 엄마와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여동생이 우리를 찾아왔다. 친구의 엄마는 표정이 밝지 않았지만, 나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한국에서부터 나는 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가정교육을 철저히 하신 어머니 덕분에 어른을 공경하고 남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배웠다. 미국은 이런 어른 공경의 문화가 없다는 걸 알지 못한 나는 매우 깍듯이 친구의 엄마를 대했다.
한국 유치원에서 배운 "Mrs."라는 호칭을 꼭 쓰며 잘 보이려 애썼다. 친구의 동생이 그네를 타려는 것을 보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아이를 안아 태워주려 했다. 그러자 친구의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생을 낚아채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No!
나도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고 모래 위로 넘어졌다. 그리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친구와 동생은 엄마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 이 상황을 엄마 아빠에게 설명했지만, 부모님은 문화 차이겠거니 하며 사건을 크게 여기지 않으셨다. 한국에서는 늘 “배려심 깊다”는 칭찬을 받던 나는 이 상황이 몹시 곤혹스러웠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문화 차이라기보다 그 시절 그 마을에서는 내가 아이여도 경계심 있게 다뤄야 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젊은 백인 엄마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나를 멀리했을 거라고 이해해보려 한다.
그때 이후로 나는 니콜을 보지 못했다. 가끔 놀이터에 나타나도 나를 피하곤 했다. 의기소침해진 나는 붐박스도 더는 들고 가지 않았고, 금세 혼자 모래놀이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날, 미국 친구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 첫 시발점은 바로 그날, 그 놀이터에서였다. 그날 이후 나는 미국 사회에서 늘 모든 행동과 언어를 더 조심하며, 눈치 보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가 하는 행동이 미국 문화에서 적절한 것인지 곱씹어 본다.
나는 영원히 이곳에서 이방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