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선물인가, 준비되지 않은 숙제인가?

혼전임신과 난임병원에 대하여

by 남산책

혼전임신이라는 말이 지금은 축복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20대때에도, 재작년 결혼전에 동거를 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가족들에게 말을 했었을때도, 우리 엄마는 결혼전에 임신은 안된다 라는 말씀을 하곤 했다. 내주변에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커플한테 축의금을 준 것만해도 4커플이 넘는다. 그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린 것도, 나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었다. 엄마가 저렇게 말씀만 하지 않아서도 말이다. 사실 13년 전 내 바로 위의 언니도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했다. 혼전임신을 겪은 우리 엄마는 13년이 지나고 내가 혼기가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혼전임신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3년 전에 우리는 그렇게 친한 자매는 아니었다. 각자도생 하듯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고 개인적으로 고민을 터놓거나, 용돈을 달라고 한적 없이 그저 그런 자매였다. 연락한번 안 했던 언니에게 전화가 왔고, 어색했던 안부전화로 자신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엄마에게 들었던가, 또다른 언니에게 들었던가. 먼저 전해들은 임신 소식을 나에게 그저 그런 소식이었다. 언니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고, 언니가 그 당시에 느꼈을 두려움이나, 막막함까지 헤아리기에 그때의 나는 사회초년생이였고, 어렸고, 가족이라 기보다는 타인의 임신은 내인생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남의 일일 뿐이었다.


언니는 기뻤을까? 5년이상 장기 연애 끝에 헤어졌고, 2-3년 공백을 가졌던 남자친구와 다시 재회 후 생긴 아이였다. 아무런 준비없이 찾아온 생명은 정말 ‘뜻밖의 선물’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건 혹시 생명에 대해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할 의무와 책임을 ‘축복’ 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배 부르기 전에 급하게 진행했던 결혼식을 보았고, 사진작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첫 월급으로 샀던 DSLR 카메라를 들고 언니 결혼식을 찍어줬던 것이 기억난다.


시간을 흐르고, 신혼집이 강원도에서 시작한 언니의 배부른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다른 언니들에게 들었던 간간히 들리는 소식에는 출산예정일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입원을 했고, 무통주사를 맞아가면서 산통을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악의 상황은 다겪은듯한 산통은 남자들의 군대이야기처럼 무언가 첨가된 이야기라고 하기엔, 자신의 산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산후 조리원이라는 곳도 언니덕에 가보았다. 유리창 건너로 아이를 보지 않았고, 때마침 조리원 방문시간에 맞춰 모유수유가 끝나고 언니와 아이가 같이 있을 시간에 나는 그 당시 사귀고 있었던 남자친구와 같이 언니를 보았다. 산후조리원에서 본 언니는 이전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여자와 엄마는 다르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언니가 지금 겪고 있는 세계관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준다. 모유수유도 사람마다 다르다. 출산했을 때 겪은 고통도 다다르겠지만, 여기 있어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같이 조리원 생활을 하고 있는 20대 베트남 부인의 모유는 넘치다 못해 다 짜내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야기, 미역국의 종류가 그렇게 많을지 몰랐다는 이야기 지금은 마디마디가 쑤신다는 건 애 낳고부터가 시작이라는 말도, 언니는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에 이야기를 해준다. 조카를 안아보라는 말고 함께 내 팔에 안겨주는 언니는 작지? 이쁘지? 계속 물어본다. 하얀 천에 눈을 감고 빨갛고 작은 아이는 그저 깨질 까봐 무서워 힘을 주지고 멋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뻣뻣하게 안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반면 같이 간 나의 남자친구는 달랐다. 꽤 아른거리게 아이를 보고 있는 눈빛이 기억난다. 무언가 뻣뻣해진 팔처럼 뻣뻣했던 마음이 그 친구를 통해서 대신 살짝 녹아내린 기분이다.


이 언니 결혼식하기 전에 미리 가족에게 소개해준 이 남자친구는 나와 결혼에 대한 꿈을 꾸었다. 몇 명의 아이를 상상하고, 나와 어디에서 살고, 얼마의 경제력으로 저축할지 계획했던 친구였다.

이번 결혼식장에 같이 동행해준 남자친구는 이제 나와 결혼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지만,

그 꿈에 나는 동참해 줄수 없었다. 그의 타이밍과 나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그때 당시의 나는 결혼은 이 친구가 할지 언정 아이라는 존재를 내 삶에 들일 생각을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칼같이 지켰던 피임에 대해서도 더 견고해진 것 같다. 그 친구가 내미는 우리의 행복한 가정보다는, 나의 커리어 지금 이 회사에서는 애 키우기 힘들겠다는 걱정과 함께 동반되는 이직 스트레스, 그가 나에게 준 안정감은 나를 더 열등해지는 스위치가 되곤했다.


결국 그 친구와는 언니 결혼 이후 2년을 더 사귀고 헤어졌다. 그가 결혼을 이야기하고 딱 2년 반동안 나의 마음이 바뀌길 기다려줬지만, 나는 더 열등한 스물아홉살 사춘기를 맞이하며 이별했다. 이때만해도 나는 임신은 쉬운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만 잘 걸어잠그면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몰랐다. 그 문을 걸어잠그는건 쉬워도 여는게 힘든거라는 것을, 그로부터 10년 후 지금 나는 난임 병원 대기실에 앉아 문득 언니를 생각한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