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해서가 아니지만,
같이 원하고싶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방법

by 남산책

나는 혼자 끙끙거리며 일하는 과정을 꽤 즐기는 편이었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할 필요도, 아쉬운 부탁을 할 필요도 없는 그런 일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팀워크가 중요한 종목에는 흥미가 없었다. 풋살이나 농구보다는 단식과 복식이 나뉜 배드민턴이나 테니스가 나았고, 그중에서 수영, 등산, 달리기처럼 함께하면서도 각자의 페이스를 존중받는 운동들이 내 적성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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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결심한 배경에는 지금의 남편이라는 사람의 지분이 7할, 아이가 2할, 그리고 나머지 기타 요인이 1할 정도를 차지한다. 사실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나를 '여자친구'라며 부모님께 소개해 드린 날이었다.

초면이라 무척 긴장했다. 아들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치구를 인정받기까지, 남편은 꽤나 애를 썼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장남이었지만 첫째가 아니었고, 이미 결혼한 누나와 무려 세명의 조카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보다 훨씬 젊으신 그의 부모님은 열린 마음으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부모님의 태도가 우리의 연애사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자식 귀하듯 나를 대해 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영종도에 오면 밥 한 끼 사주겠다는 말씀에 식사를 대접받고, 다음엔 내가 대접하는 식으로 일 년에 다섯 번 넘게 얼굴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가끔은 두 분이 내 앞에서 술김에 가볍게 다투기도 하셨다. 우리 가족과는 결이 다른 싸움의 색깔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미안하셨는지 "술 먹고 한 행동이니 이해해 달라"며 거듭 말씀하셨다. 두 분의 연애와 결혼 생활이 꽤나 파란만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역시 막장 드라마의 소재보다 더한 것이 현실이라는 걸.


간혹 부모님의 바람이 섞인 말씀이 들릴 때면, 마음속으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내가 굳이 이걸 들어줄 의무가 있나?' 하고 말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드라마 대사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널 위해 어떻게 희생했는데!" 같은 것들이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너도 낳아서 그 행복을 느껴봐야지"라는 강요도 없었다. 나에게 연애는 필수였지만 결혼은 선택이었고, '이제 정말 결혼이라는 카테고리를 준비해야 하나' 싶을 때쯤 동거 중이던 남편에게 물었다.


결혼하면 자녀를 갖고 싶다는 그의 바람. 사실 우리는 동거 전, 헤어짐과 만남의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금전적·물질적 정리를 명확히 마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바람을 내가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렸다.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생기면 낳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늘 피임에 강박을 느끼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 생기면 책임질 나이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담이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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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저 꺽지 않은 들꽃이 이쁜 것처럼 나에게 아이는 저만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생물체였다. 아기 냄새가 그립다고 아이를 빨리 보고 싶다는 시댁 친인척들의 말도 그저 한 귀로 흘리고 싶었다. 아이의 조그마한 손도, 보드라운 피부도 아이냄새로 나에게는 그저 촉각이 아닌 시각적인 반응밖에 할 수 없다. 그저 나의 책임감으로 무언가 나에게 변수가 생기거나, 사건이 생겨도 나는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 주변 아이를 낳은 회사 여자동료들도 겪어보면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그중의 한 사람 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은 진행되었다. 로망도, 내 명의의 새 아파트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부모님의 지원도 없는 8월의 예식이었다. 결혼을 다짐함과 동시에 우리가 동거하던 전세 빌라에 당근마켓으로 하나둘 채워 넣은 살림들, 그 소박한 공간에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우리 결혼식에는 이왕이면, 처음이고, 신혼이니라는 의미보다는 쓸만하면, 기왕이면 중고로 그리고, 보기 좋은 것보다는 쓰기 좋은 것을 고르는 두 사람 안목으로 채워나가길 바랐다.


이제는 내가 아닌 우리에 대한 미래는 계획하지 않았다. 아이를 언제 낳고, 아파트로 이사를 언제 가면 좋겠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대략적인 스케도 하지 않았다. 계획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하루 루틴을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미래도 바꾼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오늘을 어긋나지만 않게 살아갈 준비만 해갔다.


회사 동료들과 친구들은 "결혼 얼마 안 남았네", "이건 준비했니?"라며 나보다 더 난리였다. 하지만 정작 내 머릿속은 '허니문 베이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8월에 결혼식이었지만, 7월 보건소에서 산전 검사와 가임력 검사를 마쳤다. 아홉 살 어린 남편은 그저 튼튼하겠거니 싶어 따로 검사하지 않았다. 배란일만 잘 맞으면 당연히 생길 거라 믿었다. 나는 스스로 꽤 예민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어디서 부딪혔는지도 모를 멍투성이 무릎과 손가락의 상처를 보며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무딘 사람이었다는 걸. 그렇게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생기면 기꺼이 낳겠다는 마음으로 여섯번 중에 한번은 걸리겠지라는 마음으로 17% 확률에 베팅해본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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