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특한 순간
풋살 수업 2일차다. 유행하는 여자 축구 프로그램(골때녀)를 눈여겨 본 적? 없었다. 학창 시절에 축구? 승부에 연연하는 남자애들이나 하는 공차기쯤으로 치부했다. 태클하다 다치는 위험한 운동을 왜 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작년에 한 모임에서 만난 여자분이 퇴근 후에 풋살을 한다고 했다. 멋지다 생각만, 했다. 나도 해볼까 하는 호기심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슨 바람이 들었냐고 묻는다면, 애들 때문이다.
우리 반 여자 회장 수연이는 운동을 잘한다. 순발력도 좋고 이해도 빠른 똑똑한 아이다. 꼼꼼하게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빨리 결과물을 만든다. 그것도 제법 그럴싸하게. 옆 옆 반의 남자애와 깨졌다 사귀기를 반복 중이다. 공식 커플임에도 우리 반 남자아이들은 운동도 잘하고 털털한 수연이를 좋아한다. 서로 스스럼없이 놀다가 때로는 과한 장난도 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수연이는 괜찮다면서 환하게 이를 보이며 넘긴다. 선생인 내가 자기를 불러서 쉬는 시간이 줄어들까 봐 하는 행동이다. 수연이가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 열지 않았음을 안다. 나 역시 그렇다. 어느 때는 수연이의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본다. 믿기지 않겠지만 학창 시절 나는 매년 계주 대표로 나갔다. 6학년 때는 말썽도 많이 부려서 선생님이 내 이름을 줄곧 불렀다. 학교가 끝나면 방방을 타러 갔다. 30분 요금만 내고 아저씨 몰래 2시간을 탔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6학년 2학기 보습학원으로 끌려가기 전만 해도 그랬다. 수연이를 보면 어떤 면은 내 어린 모습을 엿보는 듯했다. 그래서 정이 가기도 하고 더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수연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올해 2학기부터는 운동장 체육을 온전히 내가 가르쳐야 했다. 부담이었다. 고학년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나도 애들을 재밌게 해주고 싶다. 때론 같이 땀을 흘리고도 싶다. 하지만 모두의 취향을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처럼 공만 던져주고 피구만 주구장창 하라고 해도 지겨워할 아이들이다. 초임 때부터 운동장 연수도 곧잘 다녔다. 그래도 체육 수업은 여전히 어려웠다. 나는 아직도 피구, 배드민턴, 발야구 등의 종목별 경기장 크기 감각도 잘 안된다. 일단 동 학년에서 구매한 스피드민턴과 줄넘기로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반 아이들이 축구를 좋아하니까, 수연이는 축구선수가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나도 해보고 싶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풋살 동호회에 가보는 거다. 곧장 동호회에 가는 건 민폐라고 생각했다. 한 달은 학원에 등록해서 기술을 배우고 다음 스텝인 동호회로 가야지,라는 나름의 포부가 있었다. 그래서 학교 앞에 있는 축구 학원에 등록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나는 내가 금방 배울 줄 알았다.곧잘 할 줄 알았다. 웬걸 제자리 드리블부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발등을 피고 공을 올려야 하는데 발가락이 자꾸만 들린다.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로 공을 몰고 가는 것을 해보았다. 자세가 어색해서 축구가 아니라 이상한 태극권을 하는 것 같다. 공도 한 번 차 봤는데 맥없이 나아간다. 지금 배우는 건 6~7세 아동반 커리큘럼이라고 했다.
‘아… 올해 애들 앞에서 뽐내기는 글렀구나.’
첫날 바로 단념할 수 있었다. 코치님은 웃으면서 처음엔 다 그렇다고 괜찮다고 말한다. 정말 괜찮은지는 아직 모르겠다. 자꾸 발등이 아닌 발가락에 공이 맞아 아프다. 풋살 동호회는 올해 안에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더 해보고 싶었다. 축구를 하는 내 모습이 뭔가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팀을 이루어 경기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래서 체험 수업 후 등록했다. 퇴근하고 늦은 밤에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 근처로 가야 한다. 성인 여자 반은 저녁 9시에 시작하는 데 이전 수업이 우리 학교 5~6학년 학생들 수업이다. 마주치기는 아직 민망하고 부끄럽다. 누가 알아볼까 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살금살금 풋살장으로 들어간다.
어쨌든 풋살을 배우겠다는 마음을 먹은 자체에 스스로 놀랐다. 겁도 많고 수술 후에는 건강염려증이 더 심했는데 말이다. 초등학교 때 어떤 남자애가 한 말이 여전히 기억난다. “너는 달리기만 잘하고 공을 무서워하더라.” 맞다. 나는 피구 공 날아오는 것도 무서워했다(변명하자면 우리 때는 피구 공이 엄청 딱딱한 배구공이었다). 언제부턴가 못하는 건, 아니 못하게 보이는 건 아예 시도조차 안 했던 것 같다. 잘하는 것만 보여주고 뽐내고 싶었다.
수술을 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스스로 일어서고 걷고 뛰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당연했던 걸 다시 하게 되는 데에 노력과 품이 들어갔다. 병원에서의 물리치료부터, 1:1 필라테스, 무용, PT, 요가, 이제 그룹 필라테스까지 그래 그래도 꾸준히 했다. 물론 다른 이들보다 가동 범위도 안 나오고 근육도 잘 생기지 않는 체질이다. 다칠까 봐 두려워하는 겁쟁이인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런 내가 풋살을 해보려는 게 작은 변화라면 변화다. 생각을 하고 바로 실행에 옮긴 것도 말이다. 다치는 것보다 내가 뛰어다니는 상상을 한다. 공을 컨트롤하고 어시스트를 하고, 짜릿한 골을 넣는 것까지 말이다.
하나 더. 얼마 전 친구와 오랜만에 노래방을 갔다. 그날 컨디션이 좋았는지, 노래방 기계 덕인지, 목이 풀린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갑자기 고음이 쫙쫙 올라가는 나를 보았다. 아니 뭐지? 신기하게도 배에 힘이 쥐어졌다. 호흡도 길어진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발성 연습하고, 달리기하면서 호흡이 늘었나? 그간 운동으로 보이지 않는 복근이 좀 생긴 건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쉽게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고 새삼 즐거워졌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한 계단 위를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이런 작은 변화가 기특하다. 베란다에 방치한 화분에서도 새순이 돋았다. 작렬하던 햇빛과 숨이 막히는 무더위에서 작은 잎새를 내밀다니. 잎이 커진 것도 좋지만 새순이 돋은 걸 볼 때는 반갑다. 무심한 주인 밑에서도 기특하게 잘 자라고 있구나. 나도 나를 기특하게 많이 바라봐 주고 싶다. 사소한 거라도 더 많이 찾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