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며 ‘시절 인연’이란 말을 쓰곤 한다. 어느덧 주위 친구들이 결혼하고 육아도 하면서 전처럼 마음껏 연락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래서였을까? 작년부터 새롭게 만난 인연이 많아졌다.
지난 금요일, 여름 방학 연수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선생님 두 분을 만났다. '문학적 캐릭터를 활용한 글쓰기'라는 1박 2일 숙박 연수였는데, 저녁 6시에 첫날 강의가 끝났다. 해가 길었던 한 여름밤, 내 룸메인 라일리의 "저녁 먹고 같이 산책할까요?" 제안으로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단순해지고 싶은 라일리(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연수를 듣던 '강해 보이고 싶은 자스민(알라딘의 히로인)', 그리고 나-'몸을 쓰는 것도 좋아하는 셀린(영화 비포 선라이즈 이하 비포 시리즈 여주인공)까지. 우리 셋은 함께 숙소 밖으로 나와 걸어서 갈 만한 카페를 찾았다. 초행길이라 중간에 길을 헤매기도 하고, ‘날씨가 덥죠? 연수원까지 오는 데도 힘드셨죠?’ 같은 가벼운 얘기로 침묵을 채우기도 하면서 자그마한 카페에 도착했다.
시원한 카페 안에서 얼음으로 가득 찬 음료를 마셔서였을까? 우리는 본격적으로 왜 연수를 신청했는지, 서로의 관심사, 그리고 경력과 신상을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잊고 있던 내 과거 경험도 생각났고 줄줄 흘러나왔다. ‘저도 그거 해 본 적 있어요.’ ‘저도 들어봤어요.’ ‘와 재밌겠어요.’ ‘알려줄게요.’ 순간 각자의 세계가 활짝 열린 것 같았다.
연수의 마지막 수업에서 우리는 각자 두 쪽짜리 짧은 소설을 썼고, 이를 모든 이에게 낭독했다. 허구의 글이라도 자신의 삶이 묻어날 테니 내적 친밀감이 생겼던 것 같다. 짧은 연수이기에 그 시간 최선을 다하고 스쳐 지나간다는 거쯤은 이제 나도 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이 소중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자스민의 제안으로 다시 모였다. 드디어 날씨가 풀려 걷기 좋은 가을밤이다. 카페로 가는 지도를 보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스민은 네 곳의 음식점 후보를 카톡에 제시했다. 흑백요리사에 흠뻑 빠졌다는 라일리는 양식을 먹고 싶어 했다. ‘우거지라구파스타’처럼 독창적이고 맛있는 메뉴가 많았던 한 음식점에서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었다.
라일리는 보면 볼수록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학생처럼 보였던 첫인상과 다르게 어느덧 10년 차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결혼한 지는 8년 차가 되어가는데, 결혼 조건으로 주말부부를 내걸었다고 했다. 이유는 자기의 덕질 생활을 지키고 싶어서라고. 연극, 뮤지컬, 클래식 등 다 거친 뒤 지금은 판소리에 가장 빠졌다고 했다. 이날은 한복 저고리를 입고 왔다. 나는 멋지다며 한 바퀴 돌아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 저고리가 가볍고 편하다며 집에 색깔별로 모아 서른 벌이 있다고 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셰프의 요리가 궁금해서 벨기에의 파인 다이닝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번 빠지면 끝장을 보는구나, 그리고 바로 실행하는 저 추진력에 엄지 척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듣고 싶던 강의를 들으러 대학생 때 휴학한 적이 있다고 했다. 타 대학교수들에게 메일을 보내 청강했다고 한다. 그중 누드 크로키도 있었다며. 나는 연신 ‘우와’를 내뿜으며 들었다. 연수가 끝나던 날에도 공연 보러 인천까지 간다던 그녀였다.
“선생님들, 그동안 일신의 변화가 있었어요.”
그런 라일리가 임신을 했단다. 그것도 쌍둥이! 연수가 끝나고 알게 되었고, 계획하지 않았던 일에 놀랐다고 말했다. 지금은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했다.
“축하해요. 그런데 저 웃어도 돼요? 뭔가 라일리는 늘 시트콤 같아요. 귀여워.”
그녀는 우리에게 작은 거울을 선물했다. 자기 집에 누군가 놀러 오면 주는 굿즈라고 했다. 방문 횟수에 따라 업그레이드가 된다고 했다. 나도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자스민은 한때 메뉴판을 만들었다고 했다. 집들이에 오는 손님을 위한 요리가 적힌 작은 메뉴판. “그것도 저 따라 할래요.”라고 말하는 나는 욕심쟁이다. 처음 자스민을 보았을 때 리액션도 좋고 사랑스러워 나보다 한참 어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맡언니였다. 그녀가 연수 끝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계속 쓰셨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을 따스하게 봐요.” 그 말이 과분하게 들리면서도 힘이 되었고, 참 고마웠다. 올해 나온 엔솔리지 에세이 <선생님의 안부를 묻습니다>도 방학 때 바로 읽고 소감을 전해주셨다.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걸 넘어 넘쳐흐르는 독후감이었다. 방학 때 그녀와 단둘이 잠시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의 비밀 장소도 알게 되었다. 인디 영화를 상영하는 ‘광화문 씨네큐브’, 노을이 질 때 더 멋지다는 통창으로 된 ‘이수역 아트나인’. 스쳐서 듣는 장소들을 이제는 나도 바로 저장한다. 뭐? 탱고도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자스민 덕분에 탱고 음악에 연주 악기라는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찾아보았다.
나는 7월에 시작해서 매주 목요일에 참여했던 연극 놀이 수업이 이번 주에 끝났다. 그리고 엊그제 소설 한 편을 마감했다. 실은 그 소설에서 그녀들을 만난 1박 2일 연수 이야기를 녹여냈다. 그래서 이날 라일리와 자스민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고 근처 카페로 갔다.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테라스에 고양이가 올라와 뒹굴뒹굴한다. 창밖으로 테이크아웃하러 기다리는 사람이 보이고, 간혹 강아지와 기다리는 손님이 눈길을 끈다. 여름날 연수원 카페의 대화는 ‘그동안 뭐 하고 살았는지, 뭐 재미있는 거 없나요?’라고 요약할 수 있다. 활짝 열린 이곳에서는 연애를 포함한 개인사까지 주제가 뻗어나갔다. 시시콜콜한 지난 연애와 썸이 줄줄이 이어지고 라일리의 결혼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이야기까지 다 말하나? 겨우 두세 번 얼굴 본 사이인데?’라는 자각조차 없이. 진심이 또 한 번 풀려나온다. 깔깔거리며 상대의 말을 듣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우리 셋에게만 조명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만의 세계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모기도 몇 방 물렸다.
우리는 서로 얽혀있는 게 없다. 겹치는 지인이 없다. 여행처럼 갔던 연수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다.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사람이다. 하루의 만남이 아니 그 몇 시간의 대화가 참 재밌었다. 이렇게 인연이 생겼다. 흘러갈 것도 안다. 붙잡으려고 애쓰지는 않으려고 한다.
“우리, 계절 별로 한 번씩 얼굴 보며 안부 묻는 사이였으면 해요.”라는 자스민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음 달에 한다는 라일리의 합창 공연에 가기로 했다. 한 달동 안 서로 어떤 경험을 했을지, 우리의 대화가 얼마나 풍성해졌을지 벌써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