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으로 이사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그간 소망했던 일 중 하나인 ‘카페’를 차리게 되었다. 처음으로 커피를 배우고 경험한 지 한 십 년만의 일인 것 같다.
이제 실전 시작.
“여기가 가장 너에게 어울리는 공간인 것 같아!”
자영업 처음 시작은 이 정도의 규모이면 괜찮다며 만삭의 언니와 형부, 남편, 엄마와 함께 합의 결정한 골목 상권이랄 것도 없는 골목의 작은 가게였다.
계약을 하고 나는 그간 소망해왔던 ‘셀프 인테리어’를 선택했다. 무모하게도 공간이 작아서 할만하다고 생각한 데다가 비용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남이 해준 인테리어보다 주인장의 느낌과 정성이 들어간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월세가 나가고 있으니 인테리어 포함 메뉴 개발까지 무조건 빨리 완성해야 한다.! ( 지금 생각하면 이때가 가장 여유 있을 때인데 그걸 몰랐다. 오픈을 하고 나니 더 여유가 없다.)
매장이 아담하여 손 갈 곳이 별로 없어 보였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매장이 크든 작든 전부 내 손이 가야 뭐든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일이 아주 많았다. 정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일들까지 하다못해 머리카락이나 먼지 한 톨을 치우고 버리는 일까지도 내 손이 가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 거라는 걸,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분명 사무실을 나갈 때도 일은 누구보다 많이 했었고,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야근도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카페 일은 직접 해보기 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종류의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그 뒤에 누군가의 많은 수고가 있다는 것을, 그 수고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또 깨달았다.
직접 남편과 페인트샵에 가서 현관문 페인트 색을 고르고 난생처음 젯소를 칠해보았다. 현관문 색이 짙어서 젯소를 두 번은 칠해야 한다는 페인트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젯소를 꼼꼼히 칠하고 말리고 총 두 번을 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고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왜 페인트 전문가가 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문은 우리가 원하는 색으로 탈바꿈했다. 이전에 있던 어두운 본인의 색을 탈피하고 화사한 느낌으로 바뀌었는데 이 문은 2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손님들에게 회자되며 칭찬받고 있다.
작은 매장의 한쪽 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예쁜 커튼을 달고 싶어 남편에게 시멘트 뚫는 장비를 사다 주고 커튼봉을 달아달라고 했다. 시멘트가 생각보다 잘 안 뚫려서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이 또한 셀프로 완성하고 – 이제 남편은 커튼봉을 잘 달 수 있다 – 예쁜 커튼을 달았다. 생각해보니 건물의 구조를 이루는 시멘트가 잘 뚫리는 게 정상이 아닌 것이다.
가구는 중고물품 가게를 전부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한 번은 운전해서 그 핫하다던 황학동에도 들렀는데 둘 다 아마추어여서 그런지 아무 물건도 못 건지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 결국 며칠 밤을 골라 인터넷으로 예쁜 원목 의자와 테이블을 주문하고, 멀바우 집성목을 주문하여 주방에 오픈 찬장을 설치했다. 테이블 상판도 제작하여 힘껏 사포질을 하고 커피 테이블도 만들었다. 꽤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30년 넘게 사용하시던 빈티지 식탁도 기증받아 가게에 놓았는데 화룡점정으로 메인테이블처럼 예뻤다.
생각해보면 셀프 인테리어를 하던 그 시기야말로 새로운 시작의 희망과 열정 가득한 시기가 아닌가! 정말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었었는데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 되었다.
아니 나에게만 추억이지 가족들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나는 내 일이라 몸을 사리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족들에게 너무 고맙다. 남편은 자신의 일을 따로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어 묵묵히 나의 요구와 나의 불안, 짜증을 다 받아주면서 힘든 일을 거의 도맡아서 해주었다.
아빠와 엄마는 집에서 청소용품과 걸레를 싸들고 와서 화장실과 창고 청소를 해주셨고, 매장 바닥과 통유리창도 닦아주셨다. 언니와 형부는 계약 전에 서울에서 지방인 이 곳까지 가게를 보러 왔는데 우리 언니는 만삭인 몸으로 먼 길을 왔다가 그날 밤에 긴급으로 애를 낳을 뻔했다.
나는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1인 카페 사장이 되었다. 요즘은 1인이 운영하는 카페가 많아졌지만 그 1인이 어떻게 가게를 운영하고 지켜가는지 잘은 모를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몰랐던 것을 몸소 경험하고 난 뒤에 정말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 일을 꿈꾸거나 좋게만 바라보는, 혹은 그래서 내게 “참 여유 있어 좋겠다.”, “나도 카페나 할까?”, “그래도 넌 사장이잖아.”, 책 읽을 시간 많겠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촘촘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여하튼 장사를 시작한 나는 - 생각했던 것보다 장사의 고충이 상당히 많다는 걸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나는 - 어느 식당을 가든, 어느 카페를 가든 그 음식을 만들고 그 빵을 만들어 내어 주는 자체의 수고에 너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전보다 더 짙은 농도의 그런 감사함이다.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인사도 종종 나눈다.
“사장님, 저 00 카페 운영해요, 여기 너무 좋네요.”
“이런 음식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가고 힘들 텐데 너무 감사합니다.” 등...
이렇게 인사를 하면 그곳 사장님들도 마치 동지를 만난 것처럼 인사해주시고, 나를 보는 눈빛이 따뜻하게 바뀌곤 한다. 다 말하지 않아도 이 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는 일종의 연대인 건가?
그래서 요즘은 단골 식당에 가서 사장님들과 안부를 묻고 간단한 대화를 하는 시간들이 즐겁다. 근처 보리밥 집에서는 코로나 여파로 우리 카페는 괜찮은지 안부를 물어주시기도 하고, 자주 가는 김밥집에선 김밥을 자꾸 더 싸주시기도 한다. 떡집에서는 우리 카페 못 가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떡 하나를 더 챙겨주신다.
매일 한 공간 안에 있지만 사무직이었을 때는 몰랐던, 반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폭은 조금 더 넓어진 것 같은 새롭고 신기한 나날들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