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또 하나의 마음가짐
큰 욕심 없이 걷는 도시 산책자에게도 운이 지지리 없는 날이 있다. 우선 따종디앤핑이나 SNS에서 프로 포토그래퍼 뺨치는 왕홍(网红)들의 사진을 보고 가는 것이 대부분이니, 막상 찾아 갔을 때 사진과 전혀 딴 판인 공간을 만날 때가 많다. 꽤 넓은 줄 알았는데 3평도 안 된다거나, 앤티크해 보였는데 그냥 무지하게 낡고 촌스러운 곳이었다거나 등등. 정말 이곳 사진이 맞았는지 의문을 품고 다시 원래 사진을 찾아본다. 이런 분위기 있는 소품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하고 수능을 보는 고3에 빙의되어 온 정신을 집중하고 가게를 둘러본다. 구석탱이에 있는 손가락만한 저 소품을 발견해서 이렇게 멋지게 찍어낸 왕홍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문이 열려있으면 양호한 수준이다. 제일 운이 없을 때는 역시 어렵게 찾아간 곳의 문이 굳게 닫혀 있을 때. 아주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에도 딱히 다른 볼거리가 없고, 난감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리고, 우산도 없고, 띠디츄싱 대기 인원은 50명이 넘어가고. 뭐 그런 날.
엄청 큰 통유리 창을 가졌다는 서점 <井观书房>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7호선 百子湾역 근처 고가 도로 근처 사무실 빌딩 8층에 외롭게 자리 잡고 있는 서점이었다. 초점 잃은 동공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담배를 물고 있던 1층 주차장을 지나 비좁고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내렸다. 규모가 작아 보이는 몇 개의 사무실들을 지나 복도 끝에 위치한 서점 가까이 갈수록 쎄한 느낌이 들었다. 뿜어져 나오는 암흑의 기운을 애써 무시하고, 다가가는데 굳게 닫힌 문 앞에 A4 용지가 펄럭이고 있었다. 휘갈겨 쓴 일곱 글자.
<今天有事,明天见>
오늘은 일이 있다. 내일 보자.
우르르 쾅! 머리 속에서 번개가 치며… 뭐 이렇게 깔끔하게 불친절하냐고 생각했다. 아니 그랬으면 위챗 공중 계정에 공지를 미리 올려 놨어야지…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무려 왕징에서 띠디도 안타고 전철 타고 왔단 말이다!!! 난 내일 또 올 수가 없는데 야속한 밍티앤찌앤은 뭐냐. 적어도 ‘对不起, 抱歉’ 정도의 사과는 써 놓을 수 있잖아… 각종 항의성 멘트들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지만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소심한 외국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에 3개의 서점을 둘러 보자고 계획한 그 다음 주 수요일에는 3개의 서점이 모두 영업을 하지 않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어디에도 불친절한 멘트조차 없었다. 첫 번째 서점에서는 ‘엇! 뭐지?’, 두 번째 서점에서는 ‘이건 꿈일거야’, 세 번째 서점에서는 ‘제기랄!!! 도시 산책은 개뿔… 거실 쇼파에 누워서 배우 박정민이 추천해준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미러>나 보는 게 생산적인 거였어’라는 생각을 했다.
씩씩거리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가게를 발견하고 문고리를 당긴다. 낭비한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하기에 잡아 당기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다. 나를 달랠 것은 낮맥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 수제 맥주 집이나 들어가 본다. 그런데 또 그렇게 맥주는 꿀 맛이라… 그렇게 도시 산책자의 실망은 금세 환희가 된다.
맥주를 마시며 ‘실망’이라는 단어와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국어 사전에는 ‘바라는 대로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몹시 상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두 글자. 산책의 핵심 요소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거늘, 가고 싶은 곳 몇 군데가 문 닫았다고 해서, 이렇게 실망하는 기만적인 행위는 무엇인가.
작사가 김이나는 라디오를 진행할 당시 청취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됐으면 해요.”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사이'라는 말만 줄곧 듣다가 '실망 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라는 것이 신선해서 마음에 담아 두었다. 앞으로 어떤 관계에서건 '실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눌리지 않고, 쉽게 실망도 하고, 그러면서 또 기대하고, 기뻐하고, 다시 실망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보자고 마음 먹었던 게 엊그제였네. 허탈하게 웃으며 도시 산책자가 가져야 하는 마땅한 마음가짐을 다시 챙겨 본다. 그래, 나는 오늘도 마음껏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
3번 찾아갔으나 3번 좌절을 안겨 준 서점 <舞美书店> 옆에 ‘푸두쓰’와 왕푸징 '더 러그'가 있다. (사실 이 서점은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푸두쓰 (普渡寺)
普渡寺前巷35号
원래 이름은 ‘皇城东苑’으로 명나라 초창기에 지어졌다. 청나라 건륭제 때 보수, 확장해서 ‘普渡寺’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이처럼 뚜렷한 만주족 양식의 옛 건축물은 매우 귀하다고 한다. 1984년에 국가 문물로 지정됐다. 별 생각없이 있길래 들어갔는데 기대보다 더 따뜻하게 나를 품어주던 공간.
푸두쓰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왕푸징 뒤안길 쇼핑몰 <王府中环>이 있다. 브런치 가게 <TheRUG더 러그>는 여러 지점이 있지만 이 잔디 광장을 품은 왕푸징 지점이 최고인 것 같다.
베이징_도시산책
도시를 산책하며 마음을 산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