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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Jan 28. 2022

내 인생 백 권의 책

귀국 정리, 책 정리 

귀국 정리를 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옷과 책이다. 김연수 작가는 평생 가장 좋아하는 책 백 권을 업데이트한 다음 일흔이 넘어서는 그 책들만 반복해서 읽다가 죽고 싶다고 말했더랬다. 거기에 착안해서 우리도 각자 최대 백 권의 책만 남기기로 했다. 그냥 책꽂이에 꽂아 두는 책 말고, 그어 둔 밑줄이 넘치는,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들만 추려 내기 시작했다. 베이징에 와서 새로 산 중국어 책(빼곡한 중국어라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만 스무 권이 넘고 그동안 친정으로 미리 배달해 둔 책도 꽤 되어서 정확히 백 권을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많은 책들을 버렸다. 앞으로 정말 소중한 책을 또 만나면 한 권을 버리고 채워 넣는 식으로 나만의 백 권 리스트를 관리해 볼 생각이다.


어쩌면 백 권도 많을지도 모르겠다. 십 대 때부터 보르헤스를 즐겨 읽던,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책을 많이 읽던 친구 C의 방에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그녀는 무조건 빌려서 읽고 행여나 사더라도 다 보고 나서는 무조건 처분했다. 책을 가지고 싶지 않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문장을 많이 읽고 싶을 뿐 책 소유에 대한 욕심은 아예 없다고 했다. 도서관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왜 책을 사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책을 빌리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읽어야 하기에 더 집중해서 절실하게 읽게 된다고도 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표지가 인상적인 책, 좋아하는 작가의 책, 유명한 서평가가 추천한 책 등 테마별로 야금야금 모으면서 정작 진짜 제대로 된 독서는 하지 않던 그때의 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였는데 그녀를 보아하니 워낙 책을 많이 읽으니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았다.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손에 잡히는 종이나 책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뿌듯함이 아니라 책 속의 이야기, 그리고 깨달음, 나아가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마음이라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지금의 나지만 백 권은 가지고 살고 싶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즐거운 작가들의 문장들을 꽂아 두고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꺼내 읽는다. 박완서, 김훈, 김애란, 김연수, 박준, 김형경, 유시민, 정세랑, 은유, 레이먼드 카버,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의 문장들. 기억력이 짧은 터라 읽을 때마다 새롭기도 하고, 거의 외워버린 문장들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현명한 나침반이, 대부분의 시간에 어떤 든든함이 되어 준다. 좋은 문장들은 옮겨 적는다. 노트에 필사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년 가을부터 ‘매일 열 개의 문장들’이란 파일을 만들어서 좋은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적고 있는데 가끔 그 파일만 쭉 읽어봐도 꽤 좋다. 내 손으로 한 번 쓰거나 쳐 본 문장들은 확실히 다르다. 


내가 처음 산 중국어 에세이, 한 장 읽으려면 두 시간이 걸리곤 했었다.




지난해부터 사용한 ‘밀리의 서재’ 덕에 다독을 하고 있다. 원래 이북 알레르기가 있었지만 요즘은 이북 전도사가 되었다. 타국에 있으니 한국 책 구하기가 쉽지 않아 시작했지만, 다양한 책들을 읽는 재미에 빠졌다. 무엇보다 밑줄 긋는 하이라이트 기능을 사랑한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듣는 낭만은 없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한 번에 모아볼 수 있고, 언제든 검색이 가능하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이다. 지금 살펴보니 내 서재에 150여 권에서 뽑은 1778개의 하이라이트가 있다. 다른 책을 읽다 가도 그때 그 문장 뭐였지? 하고 자주 검색해본다. 


새로 업데이트된 책들을 파도타기 하듯 살펴보는 일도 일주일의 일과 중 놓칠 수 없는 재미있는 일이다. 서점에 가서 책을 직접 살펴보는 일과 이불을 돌돌 감고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이리저리 신간을 서핑하는 일 중 더 좋아하는 일을 굳이 꼽자면 역시 서점에 가는 일이겠지만 후자도 매력이 넘친다. 서점에 갔다면 굳이 살펴보지 않았을 카테고리의 책들과 지금 다른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에도 쉽게 접근한다. 처음에는 멀리 했던 오디오북도 요즘엔 종종 듣는다.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오디오북을 직접 녹음해 보는 것. 이 쯤되면 밀리의 서재 홍보팀인가 싶지만 아무 관련이 없다.  


이북 서비스가 출판 시장을 잠식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는 늘 관심 있게 살펴보는 편인데 물론 초기에는 그런 부분이 있더라도 이북 서비스가 독서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려서 궁극적으로는 서로 윈윈(Winwin) 할 것이라고 본다. 내 패턴만 봐도 그렇다. 이북으로 읽다가 정말 좋은 책을 만나면 종이책을 산다.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이북 서비스에서 추천해 주지 않았다면 결코 읽지 않았을 것 같은 책들도 많다. 


심지어 같은 내용의 종이책과 이북을 동시에 볼 때도 있다. 종이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이북으로 하이라이트를 하거나 낮에는 종이책을 보다가 자기 전 침대에서는 이북을 켜서 연결해서 읽는 식이다. 그러니 독서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종이책과 이북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다. 시장 잠식을 걱정해 이북 서비스에 뛰어들지 않는 출판사 대표님들, 그러실 필요 없답니다. 제가 더 다양한 이북을 읽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쿨럭. 




다시 백 권의 책으로 돌아와서 당신이 어떤 백 권의 책을 추리고 평생 업데이트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혹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정세랑 책을 읽은 한 독자의 평이 이랬다.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문장의 취향이라는 건 정말 그렇다. 당신과 나의 리스트가 조금이라도 아니 한 권이라도 겹친다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 권의 책을 추리며 삶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 년을 연애하고, 십일 년째 함께 살고 있는 남편과 나의 리스트는 단 한 권도 겹치지 않는다는 점. 리스트로만 봐서는 친구보다는 '적'에 가까운 다르고 다른 사람이 서로 아끼고 이해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 삶의 경이가 아니면 뭐라 말인가요.


귀국 기념으로 후통 관련 책들을 잔뜩 샀다. 올해 목표~ 이 책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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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를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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