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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r 31. 2022

갑자기, 목욕탕

ft. 아무튼, 목욕탕 by 정혜덕 작가 

분기별 행사 정도로 ‘대중목욕탕’에 방문해 왔다. 목욕에도 사우나에도 큰 애정이 없는 나는 매우 달랑(?)한 준비물을 가지고 엄마를 졸졸 따라 목욕탕에 간다. 탕에 들어가기전 간단히 샤워를 하고, 뜨겁다는 호들갑과 함께 열탕도 아닌 온탕에 들어가,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10분을 참아 보려고 한다. 시계를 째려보다 9분이 지나면 1분을 깎아 먹고 과감하게 나온다. 심상치 않을 나의 묵은 때를 들키지 않을 구석 자리에 앉아 때를 밀며 즐거워하다 휘리릭 샤워를 하고 나오면 1시간 정도 지났으려나. 머리를 말리고 나면 락커 키까지 몸에서 제거한 날것의 상태로 꼭 몸무게를 쟀다. 이 정도 양이면 1 킬로그램은 줄어야 하는데!라고 늘 생각하면서. 


그렇게 간단하게 분기별 행사를 끝낸다. 엄마처럼 목욕 의식의 마무리로 냉탕에 들어갈 용기도 없고 마사지 오일이나 스크럽, 발 뒤꿈치 각질 제거 막대 등을 챙겨 오는 준비성도 없고,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는 신세계라는 ‘내때남밀’ 할 자신은 더더욱 없다. (내 때를 남에게 맡길 염치가 없는 것일지도) 그러니 나는 목욕 세계에서는 레벨 1도 아까운 수준이다. 다만 수증기 가득한 공간이라 눈에 뵈는 것이 없어 어쩌면 조금은 더 솔직해지는 모녀의 수다, 서로의 등을 밀어줄 때 번지는 엄마의 미소, 목욕하고 벌건 얼굴로 마시는 바나나 우유나 비타 500, 이어지는 청국장이나 짬뽕 같은 점심, 절대 빠질 수 없는 목욕 후 낮잠의 추억은 생생하다. 


출처: 어도비 스톡




내게 목욕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나라는 일본이다. 내게 일본인들은 매일 반신욕이라도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여탕에서 생긴 일’을 쓴 일본 작가 마스다 미리는 어린 시절 집에 욕실이 없어서 매일 대중목욕탕에 갔다고 했다. 매일 밤, 대중목욕탕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생이라니! 유년 시절 그 정도의 추억이면 목욕탕이 거의 엄마 품처럼 다정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흥분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중학생 때는 집에 욕실에 없는 게 부끄러워 목욕탕 근처에 아는 남학생이 모여 있으면 그냥 지나쳐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욕실이 없던 덕에 그녀가 그곳에서 보았던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몸의 성장과 노화의 과정, 다양한 삶의 방식과 배려하는 태도 등을 그곳에서 모두 경험하고 배웠으니. 그녀의 책을 읽다가 일본 대중목욕탕에 있는 레어템들을 발견했는데 아기 엄마가 목욕을 하는 도중에 갓난아기를 눕혀 두는 아기 침대, 일인용 소파에 대형 헬멧이 달려 있는 머리 말리는 기계, 전류가 흐르는 전기 욕조 등등이다. 와우! 


그리고 2014년 대한민국에 마일로의 <여탕 보고서>라는 웹툰이 있었다. ‘금남의 공간 신비의 세계 여탕 가본 자가 알려주는 그곳의 진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던 그 웹툰을 꼭 챙겨 봤다. 목욕탕 이야기로 52화나 그릴 수 있다니… 내가 모르던 새로운 목욕 문화에 놀라며 매번 낄낄대면서 읽었다. ‘만화가 아니다! 대한민국 목욕 장려 보고서다!’ 댓글에 폭풍 공감하며 당장 목욕 바구니를 구입하려고 했다. (물론 귀찮아서 실패했다.) 특히 가장 놀랐던 건 남부 지방 목욕탕에서는 흔하다던 등 밀어주는 기계였다. 이태리타월이 장착되어 있는 이 기계에 등을 대기만 하면 때를 쫙쫙 뽑아준다니 정말 인간의 창의성 끝은 어디인가… 감탄하며 이 기계를 직접 사용해 보기 위해 여행을 계획해봐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게다가 베이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살게 된 이후로 5년 간 공중목욕탕에서 때를 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타국의 대중목욕탕은 두 배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흠... 이런 거였군




그런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목욕탕에 4번이나 갔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의 가장 좋은 점은 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북카페인 줄 알았는데 웬걸, 그보다 사우나와 목욕탕 시설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쌀쌀하지만 두꺼운 겨울 패딩을 입기에는 애매한 3월 초의 날씨, 비까지 오던 어느 오후에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다녀오는데 너무 추웠다. 예전의 나라면 뜨끈한 어묵 국물이 생각나야 하는데 그보다 뜨끈한 탕이 간절했다. 온탕에 5분만 앉아 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자, 실행 못할 이유가 없었다. 심이 손을 꼭 잡고 탕으로 향했다. 다음 날에도, 다음다음 날에도… 


하루를 마무리하는 늦은 시간에 뜨거운 탕에 앉아 있는 게 갑자기 왜 이렇게 좋은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역시 나이가 들어서인가 싶지만 그곳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고민이 나를 감싸고 있건 우선은 나를 공격해오는 뜨거움을 무찌르고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나를 꼭 빼닮은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감상하며 두 손을 마주 잡고 실실 웃는다. 게다가 늦은 시각의 목욕탕에는 각자의 피로를 안고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함께하지만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미묘한 느낌. 함께 인 듯 함께 아닌 듯 함께 같은 너… 정도랄까. 어쨌거나 공존하고 있다. 마스다 미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이 ‘하루가 끝나가는 순간을 타인과 더불어 나누고’ 있는 감각인지도. 어쨌거나 묵직한 침묵과 가벼운 미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 시간이 좋아져 버렸다. 


혼자 목욕하러 온 분들은 말없이 몸을 씻고 때를 민다. 그런 분들이 만든 묵직한 침묵, 그 침묵이 주는 안정감을 누리고 있으면 남의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온 독한 말들이 몸 밖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탕에 앉아 묵은 각질을 불리며 마음에 낀 말의 때도 함께 녹이곤 한다.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더는 곱씹지 않고 땀과 함께 내보낸다. 


아무튼, 목욕탕 중 




목욕탕에는 온탕과 열탕, 냉탕이 있다. 온탕 39.9도, 열탕 42.9도. 온탕이 난이도 3 정도의 레벨이라면 열탕은 레벨 7까지 가파르게 올라가는 느낌이다. 한 번에 온 몸을 담그기도 쉽지 않지만 담근다 해도 오래 버티기가 어렵다. 발가락부터 야금야금, 찔금 찔금 넣어보지만 자꾸만 온몸이 타 들어가는데 어딘가 가려운 느낌이랄까. 주로 온탕에 느긋하게 앉아서 그 3도가 만들어내는 극강의 차이에 대해 감탄한다. 나도 3도 더 노력해서 이처럼 뜨겁게 불타오르는 멋진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1초 정도 생각하지만 역시 나는 온탕 체질이다. 일본에는 46도 정도의 열탕만 있는 ‘열탕 목욕탕’이 있다고 하던데 가능한가요? 스고이데스네. 


19도의 냉탕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19라는 꽤 친근한 숫자와는 동떨어진, 고통스러운 차가움이 그곳에 있다. 그간 종종 냉탕과 열탕을 스스럼없이 왔다 갔다 하는 만렙 느낌의 여사님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는데 웬걸, 내 딸 심이가 그 부류였다. 냉탕 쪽은 엄두를 못 내는 나와 달리 그녀는 냉탕을 사랑한다. 그것도 살짝 다리를 담그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넣어버리는 최상위 레벨이다. 냉탕에 있다가 온탕으로 오면 찌릿찌릿한 기분이 드는데 그게 그렇게 좋다며 꼭 느껴봐야 한다고 내 오른발을 기어이 냉탕에 집어넣었다. 5초를 견디고 다시 뜨거운 온탕으로 오니 진짜 찌릿찌릿한 기분이 든다. 덕분에 평생 모를뻔한 감각 하나가 추가됐다. 




코로나 시대의 목욕 매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가던 군인공제회관의 지하 목욕탕에는 가끔 자식 자랑이나 시댁 험담에 열을 올리던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사라지고 ‘대화 금지’라는 크고 우람한 네 글자만이 시선을 끈다. 아이와 할 말이 있을 땐 복화술 수준으로 최대한 속삭인다. 속삭이는 걸 좋아하는 열 살 여자 아이는 그 비밀스러운 시간들이 좋은지 매일 탕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만. 


대화가 금지된 목욕탕은 조금은 삭막하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다. 가끔 목욕탕이나 탈의실에서 들어야 하는 동네 여사님들의 친절한 멘트들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주로 날씨, KBS 일일 드라마(탈의실 TV에서 하루 종일 일일 드라마만 나오는 느낌은 왜 때문인지), 귀여운 아이에 칭찬일지라도 다 벗고 있으니 어쩐지 좀 부끄럽다. 


어쨌거나 타국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맞이한 2022년 한국의 목욕탕에는 대화 금지 외에도 여러 가지 금지 항목이 곳곳에 붙어 있었는데 개인 물품으로 자리 맡지 않기, 탕에 들어갈 때 샤워하고 들어가기(어길 시 향후 욕탕 이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탕에 머리 집어넣지 않기, 수영복 입을 때 비누칠하지 않기, 드라이기로는 머리만 말리기 등등이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하지 마시오>라는 문장을 만날 수 있어서 나는 조금 멈칫하며 까치발로 걷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냉탕에서 어푸어푸 간단한 수영을 하던 여사님도 있었던 것 같은데 2022년에는 절대 안 될 일이다. 


베이징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한국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유난히 더 높아 보인다. 21세기에 터진 코로나라는 재난은 우리의 문화를 다방면에서 조금 더 빠르게 성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만들어낸 비누 거품이 떠내려가지 못하고 있으면 얼른 샤워기를 이용해 하수구가 있는 쪽으로 보내고, 집게를 이용해 다른 이의 머리카락까지 통에 집어넣고 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사람들의 다양한 목욕 습관만큼 다양한 배려들이 넘실거린다. 상냥한 양해와 배려들을 조금씩 배워간다.  


어느새 익숙해진 침묵 사이로 저 구석에서 어린아이의 “아파! 아프다고!”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보드라운 아이 살갗에 온 신경을 집중해 때수건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엄마가 떠올라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내 아이의 몸에 때수건을 대본다. 삶은 달걀의 표면처럼 부드러운 아이의 살에는 묵은 때가 거의 없다. 그래도 한 번 밀어보자고 내가 낑낑대고 있으면 아이는 3초 간격으로 고개를 젖히며 “나와? 나와?”라고 묻는다. 




내가 애정 하는 ‘아무튼’ 시리즈에 목욕탕도 있다. <아무튼, 목욕탕> 


대안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정혜덕 작가가 쓴 목욕탕 이야기다. (심지어 중국에서 3년을 살았다고 해서 더 반가웠다) 세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 사는 작가의 큰 기쁨은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학교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끌어 모아 세 아이의 저녁을 정신없이 차리고 ‘밀푀유 나베처럼 차곡차곡 쌓인 피로’를 안고 작가는 목욕탕에 간다. 


‘피곤이 밀푀유 나베처럼 차곡차곡 쌓인 저녁 8시에 목욕탕에 가면 침침한 눈이 순정만화 주인공의 다이아몬드 박힌 눈망울로 바뀐다. 어깨에 얹혔던 생존과 생계의 짐은 간 데 없고 부드럽게 돌아가는 목을 되찾아 올 수 있다. 운 좋으면 마음의 괴로움과 영혼의 그을음까지 씻을 수 있다.’


전 세계에 가고 싶은 목욕탕 리스트까지 가지고 있는 작가를 신기해하며 즐겁게 읽다 보니 배경이 어마어마하다. 한때 외삼촌이 종로에서 큰 목욕탕을 운영하셨고, 엄마가 그곳에서 일했다. 시댁 어른들도 부산에서 목욕탕을 하셨고, 목욕탕을 종종 청소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이 정도면 <아무튼 목욕탕>을 쓰기 위해 몇십 년 전부터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애정이 듬뿍 담긴 작가의 목욕탕 기록들을 읽으며 또 뜨끈한 탕이 그리워졌다.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뜨끈한 탕에 앉아 눈을 감는다. 이마에 땀방울이 살짝 맺히면 몸은 녹고 정신은 살짝 몽롱한 상태가 된다. 고민거리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걱정 근심에 눌려 무거워졌던 머리가 가벼워진다. 뒤척이다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날들이 만들어낸 불면의 사슬도 풀린다. 이래저래 속 끓이는 끌탕에는 열탕이 답니다. 


목욕탕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할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치료’하기에 적합했다. 탕에 들어앉은 지 10분쯤 지나면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그럴 때 조용히 눈물을 같이 흘려도 괜찮았다. 얼굴이 좀 벌겋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목욕탕에서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 찌든 시커먼 때를 자연스럽게 내보낼 수가 있었다.


좌충우돌이 잦아진 날이면 목욕탕에 갔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어깨를 으쓱했다가 다음 날 와장창 박살 나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40도로 데워진 탕에 들어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보면 죽을 때까지 매일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울과 무기력을 떨치고 요동치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목욕탕 중 


맞다, ‘죽을 때까지 매일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불안과 안정, 기쁨과 고통, 상실과 환희의 추를 매일 조금씩 조정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매일 조금 더 얻었다고 기뻐하거나, 조금 덜 얻었다고 슬퍼하기에 인생은 너무 길고도 기니까. 그래서 오늘도 몸을 담가, 말아? 


출처: 어도비 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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