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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30. 2022

유년과 피아노

아무튼, 피아노, 김겨울


유년 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피아노를 대강 배운 것이다. 지금도 치고 싶은 가요는 대부분 칠 수는 있지만 그런 거 말고, 정말 잘 치고 싶을 때가 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악보 없이 좋아하는 곡을 ‘완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오랜 꿈 중 하나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완곡하는 것이다. 지금도 악보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칠 수는 있지만 그건 연주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악하다. 곡을 충분히 분석한 뒤 확신을 가지고 만족할 만한 속도로 치는 일을 ‘완곡’이라고 부르고 싶다.

김겨울, 아무튼, 피아노 중


그래, 이런 완곡 말이다.




어릴 때는 왜인지 모르게 피아노가 싫었다. 연습할 때 바를 정자를 그어나가는 그 지루한 과정이 싫어서 한 번 치고 두 번 긋기를 반복했다. 짜릿한 스릴과 경미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업을 이어가던 중 하루는 눈이 나빠져서 더 이상 악보가 보이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했다. 얼마나 치기 싫었으면 이런 말까지 할까 싶었던 엄마는 별 꾸중 없이 피아노를 그만 배우라고 했다. 그땐 좋았다. 이후 내 방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던 커다란 피아노를 가끔 열어서 500원짜리 노란 악보를 열고 유행하는 가요들을 열심히 쳤다.


계속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 건 최근의 일이다. 중국판 하트 시그널을 보는데 어떤 여자 출연자가(그중 내가 제일 매력 없다고 생각한) 갑자기 집 구석에 덩그러니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열더니 유려하게 치기 시작했는데 너무 멋져 보였다. 없던 매력 지수 마구 생성. 남자 출연자에게 선택받지 못한 외로움이 묻어나서인지 연주는 더욱 감성을 자극했다.


최근 보고 있는 중국 드라마 <心居>의 능력 있는 여자 주인공도 어릴 때 자신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 주던 남자 친구를 못 잊어서 다른 이를 만나지도 않고 10년 가까이 기다렸던가.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 작가도 글이 안 써질 때는 피아노를 친다고 했다. 만화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마스다 미리'(그녀의 작품을 정말이지 사랑한다)도 늦은 나이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 수업을 다시 시작할 때 그녀가 학원에 요청한 사항은 딱 하나였다. '시간은 아무 때나 좋은데요, 저… 선생님이 혼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하는 것 정말 싫은데, 거기서 가장 착하고 가장 성격이 느긋하신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요.' 선생님의 혼을 무서워하는 할머니라니 너무 귀여워서 쿡쿡 웃음이 났다.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곡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심이에게 피아노는 필수일 것 같아서, 잠시 쉬고 있었던 수업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의 귀국 시기와 맞물려 심이 학교 바로 앞에 새로 오픈한 <그레이스 피아노> 브로셔를 아주 우연히 보게 됐고, 편의점 앞에서 아주 우연히 (브로셔를 들고 있던) 원장님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고 했던가? 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다른 피아노 학원들이 주변에 참 많았는데, 이곳을 선택하고 싶었다.


상담을 받아보니 이곳은 송지혜 박사의 ‘아이콘 주법’이라는 색다른 교습법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음악의 본질은 ‘소리’라고 믿으며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바른 자세와 움직임의 원리에 대해서 배운다. 거북이 등, 아이콘 스티커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서 직관적이다. 팔 모양 뼈 모형이 피아노 위에 있는 모습이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믿음이 갔다. 좋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만이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부드러운 인상의 원장님이 너무 좋으시다. 심이가 피아노 학원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던데 좋은 소리와 좋은 선생님의 복합적인 영향인 듯하다.


최근 김겨울의 <아무튼, 피아노>를 읽었다. 한때 피아노 전공을 꿈꿀 만큼 피아노를 잘 치고, 사랑했구나 싶어서 놀랐다. 피아노 연주가 때로 그녀를 일으키는 든든한 동력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일 이외의 분야에서 이런 동력을 가진 사람은 회복 탄력성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어쿠스틱 피아노의 매력이자 나의 두려움이다. 내가 상상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힘과 속도와 터치의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 내가 소리를 띄우고 싶으면 위로 퍼져 나가는 소리가, 깊게 깔고 싶으면 바닥에 깔리는 소리가 정직하게 난다는 것.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솔직한 악기라는 것. 나의 확신 없이는 희미한 소리만 웅얼대리라는 것.


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몸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혹은 온몸으로 참여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 글을 읽을 때보다 쓸 때, 춤을 볼 때마다 출 때, 피아노를 들을 때보다 칠 때, 나는 구석구석 사랑하고 티끌까지 고심하느라 최선을 다해 살아 있게 된다. 글이 어려운 만큼 글을 사랑하게 된다. 춤이 힘든 만큼 춤을 사랑하게 된다. 피아노가 두려운 만큼 피아노를 사랑하게 된다. 나는 피아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아노가 두려운 것이다.


사랑하는 이는 또한 성실해야 한다. 성실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다. 혹은 성실하게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나는 사랑은 성실로 증명된다는 원칙에 복무하기 위해 사랑하는 온갖 것에 나의 성실을 바쳐왔다. 어떤 성실은 배신당했고 어떤 성실은 사랑과 함께 증발했고 어떤 성실은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성실은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성실로, 매일 네 시간씩 바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네 달 이상 쉬지도 않는 종류의 것이다. 다섯 살 때부터 열세 살 때까지, 그리고 스물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부디 심이가 피아노에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성실한 사랑'을 가지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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