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정지혜

우리를 만들어 온 그 세계

by 심루이


주변에 '덕질'이라는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있는 이들이 꽤 있다. 처음에는 “나이 먹고 신기하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무언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열렬히 좋아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된 후부터는(게다가 덕질은 엄청나게 열정적이고 생산적인 삶까지 선물한다) 덕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좋아하게 됐다. 그러고 보면 나도 중국과 베이징에 빠져 그 둘을 덕질하며 알차게 살았던 것이니까.


책이 좋아 책을 덕질하며 결국 자신만의 서점을 열었고, BTS에 빠져 생의 우울한 한 시절을 무사히 건너온 정지혜 작가는 이야기한다. ‘마음을 다해 좋아했을 뿐인데, 그것들이 지금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주 간단하다고. 좋아하는 것을 더 자주 하고, 싫어하는 것을 덜 하면 된다고.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의 75세 유키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뒤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중 우연히 남성 간의 사랑을 그린 BL(BoyLove) 소설에 눈떠 덕질에 빠진다. 그 덕질을 계속하고 싶어서 아흔 살까지 살아야지! 힘내야지! 하고 주먹을 불끈 쥔다.


아, 너무 귀엽고 부러운 유키 할머니. 나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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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읽으면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작가의 다음 책을 읽고 싶어서,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고 싶어서, 아주 사소하고 사적인 사랑 덕분에 우리는 힘을 내어 하루를 살고, 그런 하루들이 모여 인생을 만들어 가니까요.


이따금 제 인생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좋아했을 뿐인데, 그것들이 지금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과해서 크게 체하고 난 뒤부터는 삶이 전복되지 않도록 마음의 용량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있습니다. 요즘 제 일상은 세 가지고 구성됩니다. 일과 덕질 산책.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없어도 혹은 하나에만 치중해도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요.


행복해지는 법은 간단해요. 좋아하는 걸 더 자주 하고, 싫어하는 걸 덜 하면 됩니다.


덕질을 시작한 뒤로 저 역시 다양한 감정을 새로이 배웠습니다. 방탄소년단 멤버의 생일에 덕메들과 함께 이벤트 장소를 쏘다니며 어른이 되어서도 순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눈치 보며 살기 바빴던 내가 마음 가는 대로 공연을 즐기며 ‘자유롭다’라는 감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몸으로 느꼈습니다. 콘서트 티켓팅에 성공했을 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눈물 날 정도로 행복하다’라는 표현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요. 저는 지금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덕질은 제 삶의 풍경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관심도 없던 빌보드와 그래미 시상식을 생중계로 챙겨 보고,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다양한 음악을 찾아 듣고 있으며, RM이 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학 소설에도 손을 뻗어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민의 생일에는 생명 나눔 헌혈 릴레이에 참가해 제 인생 첫 헌혈을 했고요. … 고집 세고 편협한 우리를 이토록 쉽게 설득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일 거예요.


덕메들과 함께일 때 저는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는 정지혜’도 내려놓고, ‘아내 정지혜’와 ‘맏딸 정지혜’도 잊고, ‘사회적 체면을 생각하는 30대 정지혜’도 내팽개친 채, 그냥 내가 되어서 순수하게 웃고 떠들고 기뻐하곤 해요. 내가 나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는 장소가 있다는 것. 그게 인생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그때 그렇게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 모든 감정들을 모른 채 무미건조하게 살았을 테니까요. 끝이 얼마나 엉망이었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 때문에 불행하다 여겼던 순간이 실은 내 것이었을지도 모를 사소한 행운이나 성공보다 아름다웠다는 것을, 저는 그 시간을 통해 배웠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내게 준 것들을 떠올립니다. 사랑 덕분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바깥으로 겁 없이 문을 열고 나가는 용기를 배웠고,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도 누군가에게는 당연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함부로 뱉은 말과 별생각 없이 쓴 글이 타인의 마음을 베고 상처 입히지 않을지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인생의 균형을 잡는 법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법 또한 익혀 가고 있습니다. 마치 영혼에 나이테를 더하듯 무언가를 사랑하는데 쓴 시간들은 제 삶에 어떤 무늬들을 남겼습니다. 그것들이 없다면 더는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될 테지요.


R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이름이 우리의 학교였고, 우리의 꿈이었고, 우리의 행복이자, 우리의 날개, 우리의 우주, 우리의 빛이었어요. 여러분이 우리의 화양연화였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의 학교였고, 우리의 꿈이었고, 행복이었고, 날개였고, 우리의 우주였고, 우리의 밤을 밝히는 빛이었고, 우리의 화양연화였다고. 마음을 다해 사랑한 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모두,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거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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