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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책방] 천국을 닮은 생각의 숲, 최인아책방

by 심루이

5년간의 외국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동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 예전에는 몰랐다. 읽을 수 있는 책들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해외 서점에서 느낀 감정을 적은 정세랑 작가의 문장이 생각났다. 그곳에 있는 책들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몸 안쪽 어딘가를 타들어가게 했다고. 숨 쉬듯 다룰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곳에서는 살지 못하겠다고.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장기간 머물러야 했던 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곳의 언어를 정신없이 습득하는 동시에 나만의 베이징 서점 지도를 만들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방인의 서점 투어는 남다른 데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책을 펼치기보다는 책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쉬이 읽을 수 없는 책들 사이를 그저 헤매며 서점이라는 공간과 타국의 서점인들을 ‘구경’한다. 아쉽긴 했지만 그 시간이 책을 읽는 시간보다 하찮은 시간이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던 '청운각' 바로 앞에 있던 '모범서국', 베이징의 뒷골목인 '후통'에 위치한 시를 사랑하는 공간 '소중서점', 원나라 때 세워진 탑(万松老人塔)을 품고 있던 '정양서국'까지 몇 십 개의 아름다운 동네 서점을 만났다.


올봄, 한국에 오자마자 한 일은 역시 도서관과 동네 서점에 가는 일이었다. 제일 먼저 찾은 동네 책방은 <최인아책방>. 베이징에서부터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다.


딸아이와 함께 최인아책방으로 가는 초행길, 일층에 있는 공간이 아니어서 근처에서 조금 헤맸다. 몇 분을 두리번거리다 앤티크한 건물에서 <최인아책방>이라고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유럽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멋스러운 건물과 엎어둔 책들을 형상화한 듯한 로고와 단정한 글씨체, 울창한 나무가 어우러진 입구 풍경이 마치 한 편의 엽서 같았다. 와, 멋지다, 멋져. 감탄하며 들어가는데 옆에 있던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여기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아. 정말 그러네. 모녀가 같은 풍경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인아책방의 책들은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제일 좋은 서점은 아예 모르던 책을 집어 들게 하는 곳이 아닐까? 이 공간은 이전에는 잘 모르던, 하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와 시집들도 제일 눈길이 가는 자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책을 추천하는 방식도 남다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까?', '작가는 아니어도 글은 쓰고 싶잖아요?', 그 외에도 아이디어가 막힐 때, 번아웃 증후군에 어울리는 책 등 이곳의 주요 서가는 삶의 중요한 질문과 그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마흔이 된 나는 '고민이 깊어지는 마흔 살에게'라는 제목을 가진 책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책방 마님의 지인들이 추천한 인생 책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책 사이에 꽂혀 있던 (무려 손글씨로 쓰인) 추천 이유를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층에는 책 읽기 좋은 좌석도 마련되어 있다. 맛있는 커피를 홀짝이며 좋은 문장들을 새기는 기쁨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문 옆 포스터에는 최인아책방 북클럽이 소개되어 있었다. 매달 책방 마님의 편지와 함께 좋은 책 한 권을 받아볼 수 있는 구독 서비스다. 이런 공간에서 추천해 주는 책이라면,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이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후 북클럽 회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최인아책방을 나서며 나는 ‘만일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도서관(혹은 서점)의 모습’일 거라고 한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 문장 위로 이 책방의 입구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과 비슷하다던 딸아이의 말이 겹쳐졌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천국에 다녀왔다. 부디 동네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천국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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