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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 서점 산책] 트립북앤스페이스에서 인덱스까지

서울 독립서점 산책

by 심루이

안으로 들어가면 책방 특유의 아늑한 밀폐감이 가득하다. 그 조용한 기압에 지식욕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천장은 하염없이 높고 너비는 끝이 없는 것처럼 넓었다.


야마시타 겐지, <서점의 일생>


어느 공간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은 모든 상품에게 중요한 문제이지만 책은 유독 그런 것 같다. 공간과 책은 언제나 함께 온다. 이전에 이미 많이 지나쳤던 책인데 유독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서점이 있다. 가끔 그 책이 놓여 있던 각도와 그 책을 유심히 보기 위해 구부린 허리의 느낌마저 생생하다. 성수와 건대 근처에 있는 독립 서점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책들을 만났다.




트립북앤스페이스(TLIB)

-매일 2-7시 오픈, 화요일 휴무

-서울숲 역 1번 출구에서 170m


트립북앤스페이스는 관광학 교수님과 전공자들이 운영하는 여행 전문 서점이다. TLIB은 Traveling Library의 약자로 '여행하는 지식 서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행 책만 있는 것은 아니고 철학, 환경, 인문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한다. 사실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여행인데, 그렇게 따진다면 어떤 주제라도 소화 가능하지 않겠냐며. 매월 독서모임, 여행 모임, 아카데미,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작은 독립 서점의 또 하나의 길은 공간 대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인아책방이 처음부터 공간 대여를 염두에 두고 층고가 높은 서점을 오픈한 것처럼(최인아책방 아래 3층 공간에는 큐레이션된 책을 마음껏, 혼자 볼 수 있는 <혼자의 서재>라는 서비스도 있다.) 이곳의 루프탑 테라스를 보는 순간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좋은 강연과 노래를 듣는 그런 상상을 했다. 독서 모임이나 작은 결혼식도 좋겠는데. 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유골을 시 코너 구석 구석 갈라진 틈새 사이에 몰래 뿌렸다는 편지를 받은 샌프란시스코 시티라이트 서점이 생각나면서 내 장례식은 이런 곳에서 하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가능하다면 심이가 예쁘게 차려 입고 짧은 편지를 읽어주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곳은 루프탑뿐만 아니라 세미나룸 대여(4만 원~12만 원)도 가능하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성수라는 핫플레이스 안에서 번잡하지 않은 조용한 공간이라 매력적이다. 다양한 인문학 강의는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서 확인 가능하다. 7월에는 <도시 디자인 속의 인문학>이란 주제의 강연이 진행된다.

TLIB BOOK & SPACE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를 사고 싶었는데 하필 그 책이 없었다. 솔닛의 도서 목록이야 늘 꿰고 있고 어느 서점에서나 쉽게 살 수 있을 테지만 그냥 이곳에서 그 책을 사고 싶었다. 책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멍해져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신 한양대 관광학과 교수님이 환경에 관심 많다는 심이에게 책을 추천해 주셨다. 아이들을 위한 책은 많지는 않았다. 추천해 주신 몇 권 중 심이는 <나의 비거니즘 만화>라는 책을 골랐다. 고기러버인 심이지만 최근에 고기가 환경에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에 대해 들은 뒤로는 관심이 생긴 모양이다. 입안 가득 씹어야 육즙이 느껴진다고 고기를 엄청 크게 썰어 먹는 열 살 아이이기에 고기를 먹지 않는 너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하지만 우리가 당장 무언가를 끊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관심 있는 건 비건이 아니라 비거니즘이다. 비거니즘은 '정의'가 아니라 '지향점'이며 삶의 태도이다. 당장 고기를 끊을 수는 없지만 하루에 한 끼는 비건, 한 주에 하루는 비건, 생고기는 먹지 않겠다 식으로 변화해 가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하루아침에 모든 고기와 유제품류를 다 끊어버리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이 만화는 그런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이다.


교수님은 심이 같은 학생들을 모집해서 환경 생태 여행이나 강의를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셨다. 좋을 것 같다. 심이는 아직도 국제 학교에서 하던 일들, 프로젝트 주제까지 본인들이 알아서 정하고, 자료를 서치하고, 발표까지 해내는 과정을 그리워한다.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면 정말 두 손들고 환영. 처음으로 모 교수님에게 받은 명함을 심이는 고이 간직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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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 커먼그라운드 인덱스(Index)숍

-매일 11-21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 200 커먼그라운드 3F


인덱스는 <create your index!>라는 슬로건으로 크리에이터를 위한 책과 커피, 북라이프 콘텐츠를 제안한다. 커먼 그라운드에는 처음 가봤는데 이곳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인덱스가 잘 맞았다. ‘인덱스’는 홍대 ‘땡스북스’의 설립자 이기섭 대표의 제안으로 시각문화 전문지 <GRAPHIC>과 서체 스튜디오 <글자 연구소>가 참여해 성사된 프로젝트 서점이라고 한다. '모든 지식과 의견에 대해 최적의 체계로 색인화하여 독자에게 제공'하겠다는 이상을 담은 상호가 인상적이다. 모든 책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있다는 문장을 읽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던 책은 시간의 흐름 출판사에서 출간된 <말들의 흐름> 시리즈. 말들의 흐름은 에세이 연작인데, 끝말잇기처럼 각 권 제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예를 들어 <시와 산책>-<산책과 연애>-<연애와 술>-<술과 농담>- <농담과 그림자> 이런 식이다. 총 열권으로 저자는 한정원, 유진목, 김괜저, 조해진, 김민영 등으로 다양하다. 이 시리즈가 꽤나 호응을 얻어 시간의 흐름은 시사인 2019년 올해의 루키 출판사로 꼽히기도 했더랬지.


무엇보다 책 디자인이 예뻐서 소장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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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서점과 함께 하는 산책. TLIB 근처에 있는 <낫저스트북스>도 함께 둘러보면 더 완벽해지겠다.



#도시산책 #서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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