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통과 서점

숨기에 아주 알맞은 공간

by 심루이

손님이 책에 몰입한 그 순간에, 우리는 잠시 배경으로 물러나거나, 어쩌면 그렇게 배경 속에서 희미해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책을 읽는 사람과 책, 오로지 둘만 남도록 말이에요.


<서점의 일>


윤성근 작가의 <서점의 말들>에서 '서점은 사람들이 숨어 있기 좋은 거대한 방이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서점'이라는 단어를 '후통'으로 살짝 바꿔보았다. 서점 이상으로 후통도 숨어 있기 좋은 공간이기 때문에. 하물며 인적 드문 후통에 있는 서점이라면, 그 얼마나 숨어 있기 좋은 방이 되어줄는지.


베이징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부지런히 서점들을 훑고 다녔다.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딱히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어도 그냥 서점이라는 공간, 그 안의 사람들이 좋았다. 특히 베이징 뒷골목인 후통(胡同)과 서점이 만나면 매력이 폭발했다. 후통 서점에서 가끔 멍하니 앉아 있곤 했는데 활자 중독자인 내가 서점에서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그럴 때면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 청각, 촉각까지 총동원해서 공간을 인식하고자 노력했는데 그 시간들이 매우 특별해서 때로 이방인의 특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아주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베이징에 있는 삼 천여 개의 후통 중 가장 오래되어 ‘후통의 뿌리’라고 불리는 '좐타(砖塔)후통'을 걸었다. 원대에 형성된 이 후통은 골목의 동쪽 입구에 벽돌로 지은 탑이 있다고 해서 '좐타'란 이름이 붙었다. 과연 아주 멀리서도 오래된 탑 하나를 찾을 수 있었는데 원나라 초기 승려인 ‘만송행수(万松行秀)’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라고 한다.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탑을 품은 곳에 아름다운 서점 <정양슈쥐(正阳书局)>가 있다. 정양슈쥐의 창립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빠링허우(八零后_80년대 이후 출생자)다. 80后인 ‘최용(崔勇)’이 2014년 이 공간을 인수해 문을 열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의 청춘을 베이징 역사와 관련된 오래된 물건들을 모으는 데 쏟았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 정양서국에는 고서적, 옛 사진, 옛 지도 등 예전 베이징 문화와 관련된 서적과 물건이 가득하다. 베이징의 멋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나도 1936년 프랑크 돈이 그린 베이징 지도를 하나 구입했다. 정양서국은 2018년부터 출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주로 예전 베이징 사진들 같은 진귀한 자료들이다. 그러니 이곳은 단순히 ‘서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과거와 현재의 베이징을 품은 문화 공간’ 정도랄까. 후통과 탑, 역사, 서점의 조합이라니... 정양슈쥐에서 나는 사랑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올 때의 벅참으로 한동안 마음이 얼얼했다.


베이징 대표 관광지인 난뤄구샹(南锣鼓巷)에서 뻗어나가는 후통 중 하나인 '후원은사 후통'. 원래 원나라 대사찰이었던 ‘원은사 뒤쪽에 있는 골목’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었는데 지금 사찰은 사라지고 ‘Poetic Books’를 표방하는 서점 <샤오중슈팡(小众书坊>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시집을 만날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처음 목도한 풍경은 안경을 추켜올리고 곧 시집에 빠질 듯한 눈빛으로 열중하며 시를 읽고 있는 어르신이었다. 이 풍경이 실로 생경하면서 따뜻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시를 읽는 사람 보다 읽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은 사회에서 시를 중심에 두는 위험한 도박 같은 서점을 만든 사람은 펑밍방(彭明榜) 선생. 그는 무려 24년 가까이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일했는데 은퇴 후에도 사랑하는 시와 늘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곳을 오픈했다고 한다. 샤오중슈팡은 현재 중국 시인들의 사랑방이며 문학 관련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는 장소다. 매일 오전 7시 30분, 위챗 공중 계정을 통해 시 한 편과 시인을 소개해 주기도 하는데, 이 서점의 위챗 계정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心上沒有詩, 就像地上沒有花朶. (마음속에 시가 없다면, 땅 위에 꽃이 없는 것과 같다)


활달하고 즐거운 서점 주인이 있던 <네관탕슈뎬(内观堂书店)>은 빠다(八大)후통 근처 티에슈시에지에(铁树斜街)에 있었다. 빠다후통은 유명 관광지인 첸먼다제 근처에 위치한 산시샹, 스터우, 쭝수세졔, 한자, 따리 후통 등 8개의 후통을 아우르는 말이다. 예전 빠다 후통은 베이징 최대 홍등가였다. 남쪽 수도 난징에 '친화이허(秦淮河)'가 있다면 북쪽 수도 베이징에는 빠다 후통 홍등가가 있었다. 시와 노래가 끊이지 않던 풍류의 골목으로 빠다 후통을 중심으로 300여 개의 기방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서민들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네관탕슈뎬의 생기 넘치는 여사장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오래 잊히지 않았다.


후통에 숨어 있는 작은 서점 바이타슈팡(白塔书房/시청취 궁먼커우시차(宫门口西岔)에 위치)과 이딩슈워(一定书屋/베이러우구샹(北锣鼓巷)에 위치)는 내게 '오늘 쉽니다*' 공격을 여러 차례 안겨줬다. 그리하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독립 서점에 두 번 이상 가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두 서점 다 수월하게 해냈다. 들어간다고 딱히 읽을 책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닫혀 있는 문을 보면 감질이 난다. 다시 와야겠다는 승부욕이 발동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두 서점에 몇 번이나 들렀다.


* 오늘 쉽니다 공격: 아무 공지도 없이 문이 닫혀 있는 공격으로 언어 실력이 달리는 이방인에게 치명적임


모판슈쥐 창업자 지앙순은 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점은 세계에 존재하는 외딴섬이다.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힘들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해 다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잘 살아가고 있다고 확인받거나 혹은 위로받기 위해 종종 시내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외딴섬으로 가곤 하니까. 소개한 곳 외에도 아름다운 외딴섬들은 후통 곳곳을 지키고 있었고 쓸쓸한 이방인이었던 나는 때로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위로를 받았다. 도시를 판단하는 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서점이 많은 도시’가 대우받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후통을 걸으며 나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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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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