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용기는 오늘 다 써버리면 그뿐
저녁이면 들르는 참새 방앗간, 집 앞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산다.
온종일 바람난 마음을 용케 붙잡은 내가 기특해서 한 잔,
아직도 늙지 않고 일어서는 마음이 대견해서 또 한 잔.
하루가 저문다.
김이경, <시의 문장들>
후통을 열심히 걷다 보면 목이 마르고 맥주 애호가인 나는 맥주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가끔 후통 작은 구멍가게에서 옌징 맥주를 하나 사서 걸어 다니며 마신다. 제대로 마시고 싶을 때는 후통 곳곳에 위치한 맥주 바에 들린다. 제일 자주 간 곳은 베이징 수제 맥주 브루어리 대약비어(大跃啤酒) 떠우지아오후통점이다. 대약비어에서 제일 유명한 맥주는 '사합원 허니마 골드(Honey Ma Gold)'인데 무려 쓰촨의 산초와 산둥의 꿀이 들어가 있다. 중국 이름은 '甫子啤酒'인데 그 지역을 대표하는 중국인인 두보(杜甫)와 공자(孔子)에서 따온 이름이다. 대약비어 후통점은 굉장히 멋스러운 사합원으로 대낮부터 정원에서 햇살 맞으며 낮맥을 즐기는 수많은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용허궁 맞은편의 팡지아 후통에는 수제 맥주와 중국 전통 음식인 전병(煎饼) 콜라보를 선보이는 '베이핑지치(北平机器)'가 있다. 이곳의 딸기 맥주와 전병 페어링은 끝내 준다. 베이핑지치는 동인당의 훈제 자두와 설탕을 함께 푹 끓여 만든 ‘Smoked Plum Ale’도 선보이고 있다.
5월의 오후, 베이러우구샹 산책의 마지막 종착지는 엘니도El NIDO라는 맥주펍이었다. 엘니도는 오후 2시 오픈이라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후통에 쭈그려 앉아서 사장님이 문을 열어 주시기만을 기다렸다. 주소는 분명히 맞는데 맥주 펍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외관에 두 시가 넘어도 아무런 기척이 없어 불안하던 나. 2시 5분, 급기야 사장님께 전화를 해버렸다. "제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문을 여실 건가요?" 숙취가 가득한 느낌의 걸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 사장님은 갑자기 문을 열고 사합원 정원의 테이블을 열심히 정리하셨더랬다. 나도 같이 도와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의자를 내리고 그랬다. 나를 힐끗 보는 사장님의 눈빛이 아직 생생한다. 맥주 달라고 전화까지 때리는 이 외국 아줌마 뭐야... 어쨌든 나는 사합원 정원에서 꽃이 눈처럼 떨어지는 것을 안주 삼아 세상에서 제일 시원한 맥주를 원샷했다. 그냥 갈까, 좀 더 기다려볼까, 과감하게 전화를 해 볼까,의 문제 앞에 과감한 답을 택했던 스스로를 칭찬해 준다.
베이징에서 배운 것들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 으뜸은 ‘여행자의 마음’이다. 오늘도 나는 '늙지 않고 일어서는' 마음으로 걷고, 용기 있는 골목 여행자의 마음으로 베이징을 바라본다. 인생에도, 산책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용기다. 매일 아침 오늘 하루만큼의 용기를 찾아서 내 안에 담고, 하루를 버틴다. 오늘 깨지고 무너져도 괜찮다고, 내일은 내일의 용기를 또 찾아서 담으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싱겁고 우습기만 한 그 마음에 얼마나 든든한지. 두려움이나 고민보다 더 무서운 건 한 발짝 더 다가가보지 않았다는 후회가 아닐까. 그러니 오늘의 용기는 오늘 다 써버리면 그뿐이다.
그나저나 동인당의 훈제 자두를 푹 끓여 만든 에일을 선보이는 팡지아나 화자오가 들어간 허니마 맥주를 만드는 대약비어, 중국인들이 여름에 즐겨먹는 음료인 쑤안메이탕으로 맥주를 만드는 징에이나... 중국 전통과 문화와 접목은 중국의 젊은 창업가들이 늘 고민하는 지점인 듯해서 이건 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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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