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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y 26. 2024

드디어 퇴원

간병 이사의 하루 

1.

퇴원 하루 전. 


매일 되는 검사와 치료, 결막염까지 겹친 탓에 엄마의 새빨간 눈은 응급실에 왔던 12일 전보다 심각해 보였다. 엄마는 본인의 모습이 무서워서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기력한 상태. 내 안타까움보다 엄마의 절망은 깊고 깊다. 


엄마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친정에 들러 집을 치웠다. 2주간 버려져 있던 공간의 대대적인 대청소. 몇 박스의 쓰레기를 버린다. 


병원으로 돌아와 나는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짐을 챙겼다. 1일은 길었으나 12일은 짧았다. 


사랑의 가장 확실한 척도가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면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나. 대학 졸업 이후 바빠지면서 나의 시간을 온전히 엄마에게 내어줬던 때가 아득하다. 늘 시간의 틈새만 엄마에게 내어주며 서둘러 내 삶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하루하루를 온전히 엄마에게 내어준 것이 세균의 공격 때문이었다니. 


나란히 누워있던 병실의 우리 공간을 둘러본다. 유년 시절 내 방보다도 작은 이곳에서 12일을 함께 살았다니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이자 엄마 곁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 시절의 나였다. 


여행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건 편안함이나 행복함보다도 오래 기억될 만한 시간이었냐 하는 것 아닐까. 


-엄마,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의 옆모습을 훔쳐봤던 이 시간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아.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았던 엄마 숨소리도.


꽤나 아름다웠던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며 숙소 체크아웃을 하듯 퇴원 수속을 밟는다. 이 여행은 언제고 다른 모습으로 다시 시작되겠지. 그때 나는 조금 더 현명한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여전히 서툴고 덜렁댈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배운 사소한 기술들이 힘이 되어줄 지도.  


2.

나 없는 2주 동안 심이는 훌쩍 성장했다. 초등 과정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수학 시험도 온전히 혼자 준비했다. 시험이 끝난 날 우리는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위기가 닥치자 문제 해결에 능한 ESTJ 춘은 더욱 빛을 발했다.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춘은 재택근무를 하며 심이와 혼자 지내는 아빠를 케어했고 매일 병원에 들렀다. 베개, 담요 같은 병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말하지 않아도 배달해 줬고, 물리적, 심리적으로 큰 버팀목이 돼줬다. 


나는 스스로를 '간병 이사'로 임명했다. 퇴원을 하니 '이사'의 하루는 더욱 바빠졌다. 엄마가 요리를 하실 수 없으니 밥과 반찬을 만들어 배달했다. 예전 같았으면 반찬가게와 배달 음식에 의지했을 테지만 병실에서 건강한 식단의 중요성에 관해 매일 연설을 들은 터라 배달 음식과 패스트푸드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표 반찬은 멸치볶음이었다. 엄마가 멸치볶음을 하는 날이면 밥그릇에 흰쌀밥을 가득 담아 반찬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따뜻한 흰쌀밥에 갓 볶은 멸치볶음과 꽈리고추가 수북하게 쌓이면 다른 반찬은 필요하지 않았지. 언제나 나를 응원하고 위로하던 그 고소함을 떠올린다. 


춘은 주말마다 들통에 따로 육수까지 끓여 다양한 국을 만든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요리하는 게 너무 즐거워, 은퇴하면 나 요리집 차릴까 봐'라고 먼저 말해주는 춘에게 고마워서 이 사람을 선택한 15년 전의 나를 한껏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나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고 가장 크게 지지해 준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사랑은 이렇게 돌고 돌아서 적당한 시기에 도착한다. 


뜨거운 소고기 뭇국을 한가득 담는다.

메이드 바위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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