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얘진 밤의 밑바닥

이렇게 미루기만 하다가는

by 심루이

홋카이도 추위가 알려 준 교훈

추위를 유독 싫어해서 버킷리스트였던 홋카이도 여행을 15년째 미룬 사람이 나다. 여름에 가면 되지 않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눈이 없는 홋카이도는 어쩐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겨울에 가는 게 아니면 안 가는 게 낫지,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느긋하게 미루기만 했던 것이다. 우리 집 서열 1위 청소년의 제안으로 드디어 결정된 홋카이도 여행. 추위에 호들갑 떠는 대회가 있다면 단연 우승후보로 등극할 나는 설레면서도 오싹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홋카이도 겨울 추위를 마음껏 상상하며 패딩 부츠, 히트텍, 귀돌이 군밤 모자 등을 구입했다. 여행 며칠 전부터는 일부러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미리 잔뜩 따뜻해질 귀여운 각오였달까.


그런데 웬걸, 상하의 기본을 히트텍으로 설정하고 털장갑과 목도리, 귀마개까지 추가하고 보니 그다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보다 따뜻하게 느껴진데다 삿포로의 길고 긴 지하로에서는 더위와 싸워야 했다. 결론은 제대로 각오하고 준비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 인생의 중요한 교훈과도 같은 홋카이도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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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얘진 밤의 밑바닥

하코다테 마지막 여정에서 시작된 눈은 후라노, 비에이를 거치며 절정을 이뤘다. 렌터카 보조석에 앉아 수많은 터널을 통과했는데 터널의 끝에서는 어김없이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을 가진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함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일본 근대 문학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첫 문장으로 꼽히는 <설국>의 첫 문장이다. 물론 이 소설의 배경은 홋카이도가 아니지만 '눈의 고장'이라는 명칭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 홋카이도가 아닌가.


터널의 끝에서도 이 문장을 떠올릴 수 없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졸고 있을 때였다. 익숙하지 않은 우핸들, 게다가 눈폭탄에서 운전을 하는 드라이버 옆에서 감히 졸다니... 싶겠지만 양심이 남아 있는 모녀는 당번을 정했다. 한 명이 춘 옆에서 블라 블라 수다를 떨고, 사탕류의 스위츠를 입안에 넣어주는 동안 한 명은 그 수다를 자장가 삼아, 눈을 따뜻한 이불 삼아 숙면했다. 그때만큼은 차가운 눈이 솜털처럼 따뜻해 보였다.


8일간 원 없이 눈을 봤더니 눈이라면 정말 신물이 나버렸다,는 결론이 났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이제 정기적으로 '하얘진 밤의 밑바닥'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결심을 하고 싶어졌다.


더 추워질 결심.


다음에는 더 제대로 눈에 파묻혀 주겠어!라고 결심하며 패딩 장갑과 방한복을 검색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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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서 맞은 두 번째 생일

설국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비에이를 달리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고 돌아 드.디.어 '이곳'에 왔다. '이곳'은 홋카이도이자 내 마음 어딘가. 오랜 시간 그럴 싸한 핑계만 대고 도망만 치다가 비.로.소 당도한 그 어딘가.


수많은 장면과 문장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는데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몸 안으로 흘러내리는 듯했다."라는 소설 <설국>의 마지막 문장, '인생을 굴러가게 하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이라는 김애란 작가의 말,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하는 그믐 서비스 대표님의 질문,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발랄하게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몇 번을 외치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 '내가 가진 50억 엔으로 너의 남은 수명을 사고 싶다'는 노인의 질문에 '내 인생은 수십억 원을 줘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다'는 대답을 노래한 일본 뮤지션 유우리의 '빌리밀리언',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라던 영화 <윤희에게>의 윤희의 미소가 한번에 떠올랐다.


골똘한 나를 보고 춘은 "무슨 생각해?"라고 물었고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해"라고 거짓말했다. 부끄러워서라기보다는 대답이 너무 길어서였고 나의 이런 상상의 나래를 극 T인 춘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저 간단하게 "나 다시 태어날 거야"라고 덧붙였다. 너무 자주 이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와이퍼로도 잘 감당이 안 되는 눈보라에 집중해서인지 춘의 반응은 심드렁했고 뒷좌석에서 졸고 있던 심이는 "엄마는 매일 다시 태어난대"라고 잠꼬대 비슷한 걸했다.


심이 말처럼 나의 '리본(reborn) 프로젝트'는 작심삼일 수준으로 한심하고 잦았지만 이번만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여행 전에 갑자기 다가온 지진 가능성 때문이었을까. 새하얀 눈 때문이었을까. 처음으로 코앞에서 눈보라를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겨우 살아나온 느낌이랄까. 이번에는 제.대.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간 허비한 시간들에 대한 자책도 사라지고 다 사랑스러워졌다. 내 전생은 누워 있는 시간이 길었지만 낭만이 있었지,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홋카이도에서 알을 깨고 두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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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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