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갈지를 계획하고 관광지를 검색하며 SNS에서 맛집 리뷰를 찾아보는 그런 여행 말고, 그냥 파도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휩쓸려가는 그런 여행 말이다. 친구들이랑 즐겁게 수다 떨지 않고, 그저 혼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멍 때릴 수 있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해외를 갈 수도 없고 전염병이 도사리고 있는 이 시국에 장기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저 하루짜리 짧은 여행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계획 없이, 검색 없이 떠날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중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집에서 아무 버스를 타고 아무데서나 내리는 것이다. 그 주변을 걷다가 모르는 버스를 타고 또 낯선 장소에 내리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버스는 어디든 있기에 검색을 할 필요도, 지도 앱을 켤 필요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 장면들을 미리 그려봤다. 꽤 재밌을 것 같았다.
날짜는 일이 없는 이번 주 화요일로 잡았다. 여행 전 날 저녁 친한 친구에게 이 여행의 개요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처음엔 신선하고 재밌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곧 나에게 다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미 익숙한 부산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다른 도시를 가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든 같은 부산 안에서 크게 낯선 곳에 찾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설득력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아무 곳이나 떠나는 내 여행의 취지가 사라질 거라고 했다.
"그냥 터미널에 가서 한 번도 못 들어본 지역의 표를 끊어서 거기를 여행하면 되잖아."
그가 툭 던진 말이 내 마음에 꽂혔다. 상상조차 안 해본 방식의 여행이었다. 나는 친구의 의견에 격렬히 반응했고 다음 날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해가 뜨고 9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이 안 되는 여행을 할 때는 일단 속을 든든히 채우는 게 중요했다. 준비물은 작은 크로스백, 보조배터리, 휴대폰, 무선 이어폰이 다였다. 집 밖을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시 들어가 우산을 챙겨 나왔다. 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이 여행에는 나만의 규칙이 있었다.
첫째, 지도 앱 안 보기 둘째, 아무것도 검색하지 않기 셋째, 휴대폰은 음악 재생용과 카메라로만 쓸 것
이 정도 룰은 만들어놔야 내가 원하는 ‘불확실한’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터미널에 도착했다. 자동판매기 화면에는 전국 팔도가 다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이어야 했다. 부산과 가장 가까운 경상남도 버튼을 눌렀다. 범위를 좁혔는데도 여전히 몇십 개나 되는 지역 이름이 나왔다. 그중에 아는 이름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내 지역을 이렇게 몰랐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
거리나 시간은 화면에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표 가격으로 추측할 수는 있었다. 너무 가까운 곳은 왠지 싫으니 한 만 원대 정도의 지역들을 찾아봤다. 그러다 ‘길리’라는 이름에 매료되었다. 왠지 이국적이면서도 순우리말의 느낌도 가지고 있었다. 가격은 11,900원, 약 15분 뒤 출발이었다.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다. 티켓을 뽑고 편의점에 들려 하리보 젤리를 샀다. 내 점심이자 저녁이 될지도 모르는 귀중한 식량이었다. 과자나 다른 음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갈 수도 있었지만 내 여행에 취지에는 맞지 않았다.
버스에 타기 전에 기사 아저씨에게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여쭤봤다. 약 2시간 반이 걸린다고 하셨다.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위쪽으로 가는 것일까 옆으로 가는 것일까?’
기사님은 또한 진주를 경유한다고 하셨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어디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검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옛날식 여행에 그런 편리함은 사치였다.
버스는 곧 출발했고 내 작은 모험은 시작됐다. ‘길리’는 어떤 곳일까? 도시일까 아니면 시골일까?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내 기분은 말 그대로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버스는 진주에 도착에 20분 정도 대기했다. 잠깐 짬을 내서 밖을 나가봤다. 옛 느낌이 나는 오래된 소도시였다. 아마 목적지가 그곳이었다면 하루 동안 별로 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시골이길 바랐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약 30분 정도를 더 갔다. 목적지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길리’라는 음성이 나왔고 나는 그곳에 내렸다.
눈앞에 조그마한 슈퍼마켓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길리마을‘이라고 적힌 비석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너머에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 펼쳐져있었다. 딱 내가 상상했던 그런 동네였다. 다만 음식점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혹시 몰라서 슈퍼에서 과자를 몇 개 사려고 슈퍼에 들어갔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셨다. 카드로 계산할 수 있는지 여쭤봤다. 안 된다고 하셨다. 큰일이다. 현금이 전혀 없었다. 혹시 몰라 몇만 원을 출금해놓으려고 했지만 까마득히 까먹었다. 문제는 돌아갈 티켓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시외버스도 교통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고 하셨다. 진짜 하리보 하나로 하루를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시계는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은 별로 출출하지 않았기에 밥집은 천천히 찾아보기로 했다. 그곳은 뭔가 아주 아늑했다. 왠지 노후를 보내고 싶은 그런 한적한 동네였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떼고 마을을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온통 초록색 투성이었다. 일상에 찌들어있던,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던 무거운 무언가가 내 몸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마저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목적지가 없는 만큼, 맞춰야 할 사람이 없는 만큼 여유롭게 주변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밭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무언가를 따고 계셨다. 나는 시골에선 다들 사이좋게 서로 인사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소를 잔뜩 머금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
하지만 돌아온 건 경계하는 표정뿐이었다. 순간 뻘쭘해져서 질문을 했다. “저, 저기로 가면 길 나와요?” 그제야 입을 여셨다. “지금 뭐 따시는 거예요?” 등 몇 가지를 더 여쭤보고 나니 그분도 미소도 가끔 섞으며 말하셨다. 대화를 조금 더 나누고 나서 인사를 드리고 나는 가던 길을 갔다. 모두에게 막역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시골사람들의 이미지는 그저 동화적 편견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생판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크게 인사를 했을 때 경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겪어보면서 나는 진짜 시골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걷다 보니 저 멀리서 소들이 보였다. 비밀하우스의 틈새 사이로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멀었다. 주택 옆에 있는 걸 보니 개인 소유인 듯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쪽을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커다랗게 짖어댔다. 정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뒤로 줄행랑쳤다. 줄이 묶여있었는지 쫓아오진 않았다. 더 이상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뛰자 그제야 창피함이 몰려왔다. 사실 나는 개들을 정말 무서워한다. 어릴 적에 물린 적도 없지만 그냥 무섭다. 그들이 짖을 때 깨물리는 상상이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그땐 그 사건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개들과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