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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숲 Jun 18. 2021

우연에 의한, 우연을 위한 여행 -2부-

비우러 갔다 채워온 여행   <13일>

  

“월월, 웍웍”     


길을 따라 걷는 내내 여기저기서 개들이 짖어댔다. 악몽 그 자체였다. 어쩔 수 없이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여서 그들의 소리를 강제로 차단했다. 그렇게 불안 속에서 걷느라 더 이상 즐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갓길 위에서 줄에 묶이지 않은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짖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다른 개 두 마리가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격한 환영이 나에겐 너무 부담스러웠다. 세 마리가 동시에 나를 향해 짖어대자,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아직은 그들과의 거리가 있었다. 순간 어디선가 배운 게 떠올랐다. 개들은 도망가는 사람을 쫓아온다고 했다. 오히려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그들은 흥미를 잃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걸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배운 대로 그들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걷다 보니 조금 더 개방된 논밭이 나왔다. 그곳에서라면 혹시 개들이 나오더라도 조금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논밭을 지나 경사 길을 올라가다 보니 절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어떤 젊은 여자분이 나오셨다. 어떻게 오셨냐는 질문에 여행왔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주변에 밥집이 있는지 물어봤다.  근처에는 없고 조금 더 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안 바쁘면 커피를 한 잔 하고 가시라고 했다. 컨테이너 박스 안쪽에 어떤 남자분도 한 분 있었다. 나는 거기서 그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것 자체가 이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역시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립고, 같이 있으면 혼자 있고 싶은 법이다. 그분들은 절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불교와 절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얘기를 하면서 서재에 책들이 눈에 띄었다. 불교 관련 도서들이 많았다. 모두 그 절의 주지스님 저작이라고 했다. 그중에 가장 입문서처럼 보이는 책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 여자분께서 그 책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부담돼서 안 받는다고 했다. 그녀는 이곳에 찾아온 것도 모두 인연이고 이 책을 읽고 불교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좋은 일이라고 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사 보겠다고 몇 번 거절했으나 더 이상은 무례한 것 같아 그 책을 받았다. 마침 절 도서관에 주지스님이 계신다고 했다. 그분께 책 사인을 받으시겠냐고 해서 얼떨결에 알겠다고 했다. 맞은편 건물에 10명 정도의 불자 분들이 있었고 수많은 서재에 책들이 빽빽이 진열되어 있었다.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스님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고 곧 책에 직접 사인을 해주셨다. 이런 전개는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스님은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여쭤보셨다. 모른다고 말씀드렸더니 주변에 ‘남사예담촌’이라는 한옥마을을 추천해주셨다. 걸어서 가기엔 비도 오고 차도밖에 없어서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스님은 그 여성분께 나를 차로 그곳에 데려다주라고 하셨다.    

  

  

그분이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옥마을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 주고 즐거운 여행을 하시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나는 다음에 꼭 그 절을 다시 방문해서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움을 받으면 그저 감사하기만 하면 될 텐데, 뭔가 마음에 느껴지는 부채감에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곳은 아까의 시골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옛날 부유한 가문들이 머물렀을 것 같은 전통 가옥들이 즐비했다. 화요일인 데다 비까지 내렸기에 그곳에 온 관광객은 나밖에 없었다. 멍 때리며 주변을 계속 돌아다녔다. 저 건너에 기다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옆 처마에 앉아서 허기를 못 참고 과자를 먹어치웠다. 절에 있을 때 내 젤리를 그분에게 공유하면서 받은 소중한 과자들이었다. 배가 조금 찼다. 그래도 저녁까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신기하다. 식당들을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막상 한옥마을에 있는 오리불고기 집을 보니까 식사의 의욕이 떨어졌다. 시간이 애매하니까 나중에 진주에 가서 저녁을 먹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4시가 조금 지나자 하늘은 먹구름 때문에 조금씩 어두워져 갔고 비는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신발이 이미 젖어서 발에는 물이 차있었다. 찝찝하고 지쳤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도에는 갓길이 없었다. 게다가 종종 커다란 트럭들도 그 길을 지나다녔다. 막막했다.     



2차선을 슝슝 지나다니는 차들을 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택시가 있기엔 너무 외딴곳이었다. 걸어갔다간 위험하기도 하고 당장 저 앞에 보이는 큰 웅덩이의 물이 온몸이 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국에서 히치하이킹이라니, 너무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그곳을 지나가는 차들은 많았다. 용기를 내 팔을 쭉 내밀었다. 하지만 차가 막상 앞을 지나가면 중력의 힘 때문인지 팔은 자연히 내려갔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손 한번 내밀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창피함을 무릎 쓰고 다시 팔을 뻗었다. SUV 한 대가 잠깐 움찔하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첫 거절이었다. 다시 한번 도전했다. 이번엔 커다란 트럭이었다. 쌩하고 지나갔다. 그다음 멀리서 BMW 차량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이번엔 운전자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려고 했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내 간절함을 보여야 했다. 그의 찡그린 표정과 함께 차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왠지 자신감이 떨어졌다. 더 이상 손을 뻗기가 겁났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 상황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다시 힘을 냈다. 이번엔 한 50번 정도 거절당한다는 생각으로 팔을 뻗었다. 한 대, 두 대, 다섯 대, 열 대가 지나갔다. 오히려 목표를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창피함은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혹시 거절당하면 어쩌지’라고 생각할 때는 괜히 소심해졌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당당해졌다. 결국 생각 안에 갇히느냐, 생각을 이용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약 30번의 시도 끝에 하얀색 티볼리 차량 한 대가 드디어 내가 있는 쪽에 멈춰 섰다.


“어디 가세요?”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앞에 탄 아주머니 두 분은 흔쾌히 나를 태워주셨다.

“저도 젊을 때는 이런 여행 많이 했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그분들과 여행에 관해 얘기했다. 곧 길리 마을에 도착했고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내렸다. 비록 민폐였지만 이런 친절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우연’이 고마웠다.      



나는 슈퍼에 들어가 버스 배차정보를 확인했다. 4시 32분과 5시 32분 버스가 있는데 시계를 보니 3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앞 시간의 차를 놓쳤다. 다시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순간 짜증이 났지만 이런 것도 여행의 일부기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건 나 자신이었다.



여행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그 당시에 좋았던 기억은 그 자체로 좋고, 고생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내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든다. 여행은 참 버릴 게 없다.      



다시 처음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아침이랑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마을은 아까보다 작아 보였고 눈앞에 풍경들은 이미 친근해져 있었다. 또한 처음엔 보이지 않던 꽃들이 눈에 들어왔고 마을의 냄새를 처음 맡게 되었다. 마을은 분명 그대로였다. 하루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날 일을 없었다. 변한 건 내 관점이었다.      



개들이 없는 논밭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그곳의 분위기를 하나라도 더 눈과 귀와 코에 담으려고 애썼다. 곧 떠날 시간이 되었다.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끝마쳤다.   


   

누군가 여행은 비우기 위해 떠나서 그만큼 다시 채워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하나의 공간을,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돌아왔다. 10년이 지나도 50년이 지나도 그곳은 거기에, 그리고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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