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거야

마지막화

by 강숲






곧 몇몇 기자들이 찾아와서 민혜 이모에게 불편한 질문을 해댔다.

“저기, 저희 민혜 방 들어가 봐도 돼요?”

“응, 되지. 저기 있어.”


방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 왼편에는 책상이 있었고 수업교재들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었다. 민혜의 침대에는 곰 인형 두 마리가 누워있었다. 방 전체에 그녀의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게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 친해지고 싶은 애가 있다고 했어.” 은영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반에서 싸운 그날, 너를 보고 왠지 마음이 아팠대. 때리는 건 너였는데, 오히려 네가 맞는 것처럼 느껴졌대.”

“민혜가 그랬어?”



“응. 민혜는 그날부터 계속 너에게 관심을 보였어. 너를 보면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뭉클거린대. 너에게 늘 말을 걸고 싶은데 계속 용기가 안 나더래. 다른 애들에게 다가가긴 쉬웠는데 네 주위에는 단단한 벽 같은 게 가로막혀있는 것 같다고 했어. 그 안에서 네가 누군가의 관심을 애타게 찾는 것처럼 느껴졌대. 그 '누군가'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


그렇게 한참 동안 속앓이를 하다가 하루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어.

‘더 이상 기다렸다간 답답한 마음이 풍선처럼 터질 것만 같아.’

‘그럼 걔 짝꿍한테 먼저 말을 걸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 보는 게 어때?’라고 조언했어. 민혜가 그렇게 설레 보이는 건 처음 봤어. 민혜는 그날 점심까지 기다렸다가 내 손을 한 번 꼭 잡고 나서 식판을 덜덜거리며 너한테 갔어.”



민혜 집 앞에서 은영과 나는 헤어졌다. 홀로 가로수 길을 걸었다. 초록 모자를 쓴 진갈색 나무들이 은은히 내뿜는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나는 민혜와 다신 함께 걸을 수 없었다.


멀리서 학교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항상 그녀와 내가 함께 하교하던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와의 추억 속 장소를 향해 걸었다. 곧 들판 입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낡은 집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쳤다. 도저히 그곳만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황금빛 들판을 건너 숲과 이어지는 입구의 벤치에 앉았다. 참새들이 짹짹대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떡갈나무들이 살랑거렸다.


그녀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음악이었다. 노래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어졌다. 그러면 그녀와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눈은 그녀를 실제로 보기를 원했고, 코는 그녀의 향을 맡기를 바랐으며, 귀는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를 원했다. 온몸이 그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영화는 끝났지만 필름은 계속 돌아갔다. 참 현실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다. 민혜의 자리는 금세 다른 아이로 대체되었다. 결석을 한 은영의 책상은 비어있었다. 오직 은영만이 그녀의 부재를 아직 잊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나와 비슷한 아픔을 느끼는 게 안타까웠고 동시에 고마웠다.


나는 그때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지쳐있었다. 시체처럼 내 자리에 앉아 수업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공책을 펼쳤는데 전에 한글로 해석해놨던 'Yesterday'의 가사가 보였다. 노래 가사를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Yesterday

어제는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내 모든 고통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이제는 그 고통이 여기 머물러 있네요.

Oh, I believe in yesterday

어제가 그리워요.

Suddenly

갑자기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저는 예전 모습에 반도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어두운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지고 있어요.

Oh, yesterday came suddenly

문득 지난날의 추억들이 밀려와요.

Why she had to go

왜 그녀는 떠나야 했을까요?

I don't know, she wouldn't say

저는 몰라요,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아요.

I said something wrong

내가 뭔가를 잘못 말했나 봐요.

Now I long for yesterday

지금 이 순간, 지난날이 사무치게 그리워져요.

Yesterday

어제는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사랑이 아주 쉬운 게임 같았어요.

Now I need a place to hide away

이제 저는 숨을 곳이 필요해요.

Oh, I believe in yesterday

아, 그날들이 그리워요.





두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노래는 다름 아닌 그녀와 나의 얘기였다.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의 선율과 함께 우리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녀는 정말 잊지 못할 음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