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시원한 비가 내린다. 벌써 여름이 끝나버린 건가. 아니면 잠깐 쉬어가는 건가. 여름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리 고개를 치켜세워봐도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리와 발가락, 부분 부분만 보일 뿐이다. 가을비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녀석의 생김새가 어떠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번 여름은 이러했구나, 하고 말이다.
하나의 큰 날씨가 떠나가고 잔잔한 계절이 온다. 들떠있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계절. 가벼운 허기가 지듯이 무언가를 쓰고 싶은 계절. 가을은 내게 그런 계절이다. 쓰기는 사실 어떤 날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물도 제철이 있듯이 글쓰기에도 그런 계절이 있다고 믿는다. 일단 봄은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벚꽃의 유혹이 너무 심하다. 누구랑 함께하든 일단 나가서 그 피어오르는 시작의 향기를 만끽해야 할 것 같다.
여름은 너무 덥다. 무얼 하든지 금세 지쳐버리고 마는 것 같다. 또한 휴가의 계절이다. 뜨거움을 식힐만한 놀이를 찾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글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지 않을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급한 대로 차가운 에어컨 밑에 숨어보지만 감정 없는 건조한 바람에 몸도 마음도 메말라간다.
가을은 이미 지나가버린 여름과 봄을 돌이켜볼 수 있는 계절이다. 나이로 치면 인생의 황혼기에 돌입한 셈이다. 그러니 조금 더 차분해진다. 괜히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읽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라면 쓰기에도 그만큼 매력 있는 계절이지 않을까.
겨울은 미련의 계절이다. 저물어가는 해를 보면서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한숨 쉬는 계절.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원망하는 계절. 다음 해는 내가 직접 떠오르게 해야지,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려보지만 축적된 실패에 그러한 다짐에 마저 자신이 없어지는 계절. 우울의 계절. 추운 날씨만큼 마음 또한 굳어버리는 계절.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믿으면서도 아직은 움츠려 있는 계절.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올해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계절.
겨울도 역시 글쓰기 좋은 계절이다. 마음속에 붕붕 떠있는 수십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글이 부드럽다면 겨울의 글은 다소 거칠지만 날 것의 솔직함이 담겨있다.
이런 글도 저런 글도, 결국엔 나로부터 나온 나의 흔적이다. 어쨌거나 무언가를 쓴다는 건,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기든 칼럼이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 모든 것에는 내가 담겨있다. 글이란 해변을 걸을 때 발에서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매일매일 의식 너머로 조금씩 사라져 가는 나에 대한 붙잡음이기도 하다. 그 흔적들을 움켜쥐는 것, 여행이 끝나고 집에 가져온 각종 기념품처럼 나의 순간들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 글쓰기란 결국 나를 위해 내가 주는, 나만의 선물 같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