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쓰고 생각하고 No.2
요 며칠 날이 추워지니 넷플릭스 보면서 이불을 덮고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겨울, 이불, 이야기, 귤. 이 조합은 대체 뭘까? 이 마성의 조합 덕에 그동안 스킵하던 CBC의 '빨강 머리 앤'을 선택했다.
드라마에선 최악으로 못생겼다 일컬으면서도 늘 예쁜 여배우가 주인공이던데 이번 앤은 리얼이었다. 너무 못생기게 잘 꾸며놔서 학창 시절 남자 세계사 선생님만 생각났던.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90년대 만화 앤의 명랑한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든 차가운 색감... 이 두 가지가 선뜻 마음이 가지 않던 이유였는데 겨울 덕에 시작하고 보니 빛나는 연기와 대사들로 며칠간 가슴이 따뜻했다.
어릴 적 만화는 낭만적 감수성을 가진 야무진 소녀 '빨강 머리 앤'의 성장을 보는 게 재미였다면 이번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양육과 교육에 대한 메시지가 깊은 인상을 줬다. 앤을 키우며 변화해 가는 마릴라와 매슈. (연기도 너무 좋다.) 편견은 연민으로, 두려움은 믿음으로, 고독은 연대로 극복해가는 두 노인의 성장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 자라는 용기의 본질을 말하는 듯 했다.
애번리 마을의 입양 가정인 초록지붕집을 중심으로 온갖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도 펼쳐지는데 동성애, 인종차별, 여성인권, 소수민족 문제까지 상당히 진보적인 주제들이다. 애번리는 언제나 소문과 갈등이 무성하고 그 중심에는 늘 앤이 있지만 사람들은 앤을 통해 토론하고 생각하고 깨우치며 변화해 간다. 어찌보면 앤을 통해 한 마을이 성장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질문을 통해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갈등 속에서만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눈물겹지만 살아있는 우리가 가진 뜨거움이고 특권일 것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 빛나는 보석을 숨겨 놓는 인생, 어둠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이 밝혀준 세상에 살아가는 고마움을 느꼈다. 추운 겨울이 여기만은 아니라는 게 위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