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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손이 Nov 11. 2022

오래 살고 볼일이다

아침 생각 No.2

굴 올빼미(Burrowing Owl)는 다리가 길고 주로 광대한 건조 지역, 풍경, 초원에서 볼 수 있다. 이 종은 다른 올빼미와 달리 낮에도 활동한다.

번뇌가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식구 많은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복잡했고 갑갑했다. 생각이 많아 고통받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 때문인지 올빼미처럼 밤을 좋아했다. 밤마다 잠 못 자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앉아있으면 뭐라도 좀 정리된 것 같아서. 덕분에 졸린 아침은 고난의 시간이었다. 세상과 조화롭지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햄릿형 인간인 내가 가끔은 좋고 가끔은 싫었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보단 행동하고 밤보단 아침을 얻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일찍 자려해도 2 시인 못 말리는 올빼미형 인간. 인이 박힌 몸의 일과였다. 마지막 남은 카드는 책무로서 나를 묶어서라도 아침을 쟁취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살고 있는 아파트 커뮤니티에서 오픈 알바를 구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흔하디 흔한 성경 말씀을 떠올렸다. '구하라 구할 것이요!' 면접을 봤고 고무적인 분위기로 집으로 돌아갔다. 결과는 낙방. 살면서 면접 보고 떨어져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 이렇게 세상 속에서 밀려나는 것인가. 아, 늙음이여. 아, 아줌마여 - 


며칠 후 연락이 왔는데 뽑은 사람이 연락두절이니 대신 와줄 수 있냐는 제안이었다. 흥. 그날부터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됐다. 새벽 5시 기상 및 11시 취침. 놀랄 변화였다. 그리고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시간을 못 맞출까 불안해서 쪽잠을 자고 데스크에 앉아 졸기도 했다. 아이들은 사라진 엄마를 찾아 울부짖고 남편은 아침 육아에 진땀을 뺐다. 하지만 조용히 기다리니 평화도 찾아왔다. 


이제 아이들은 5시 알람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잠을 자고 가끔 눈을 뜨면 엄마 잘 다녀오라고 인사한다. 야근으로 얼굴도 못 봤을 아빠와 아침 시간이라도 함께 보내니 서로에게 다행이다. 남편은 여전히 투덜대지만 제법 능숙한 등원 도우미가 되었고 나도 이제 숙면을 한다. 오후엔 본업과 육아 등으로 하루를 보내고 밤이면 잠이 쏟아져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 피로한 기분을 사랑한다.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에 의하면 심리적 엔트로피는 무한 자유에서 더욱 극심해진다고 한다. 어쩌면 버거운 과업들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뼈대 인지도 모른다. 워라벨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고르자면 나는 바쁜 쪽을 고르겠다. 생산성 없는 자유만큼 버거운 게 없음을 적어도 프리랜서들은 이해할 것이다. 중간이 없는 삶과 함께 부르스를 추며 살아가는 우리, 엉거주춤할지 함께 즐길지는 마음먹기 달렸다.  


일개미의 사고방식일지 몰라도 나는 날마다 내 일하는 삶을 좋아한다. 세상 속에 존재감 있게 살고 싶고 자기 일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린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기에 본업과 육아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아침 알바를 한다. 힘든데 왜 하냐, 애들은 누가 보냐 말들도 많지만 아침 아르바이트는 그저 나의 기쁨이다. 이 아침의 일상이 나라는 존재를 재정의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도움을 준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반가운 월급과 3분도 안 걸리는 초고속 출퇴근, 정다운 동료들과 회원님들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일이 조금 분주 해지는 10시까지 4시간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된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재촉해 등원시키고 뒷정리를 하고 나면 그 시간이 딱 10시였다. 이 4시간 차이가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미뤄둔 책을 읽고 필요한 생각을 한다.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들을 한다. 물론 멍 때리고 차를 마시고 웹서핑도 한다. 그런 시간들도 내게 위안을 준다. 어느 새벽엔 정신이 너무 맑아서 마치 별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런 때는 미뤄둔 복잡한 일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가슴이 설레기도.   


그러고 보면 궤도를 맞춰 움직이는 규칙성이 창조의 근간 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저물고 다시 또 떠오르는 태양처럼 창조적인 건 없다. 삶의 규칙성 속에서 날마다 새로 태어날 줄 아는 자에게만 오래도록, 믿을만한 영감이 깃드는 게 아닐까. 반복에 염증을 내고 다만 참아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이제 그것은 가장 얻고 싶은 마스터피스 같은 것이 됐다. 


낮에도 활동한다는 굴 올빼미를 보며 변종 올빼미가 된 나를 생각한다. 인생은 알 수 없고 나도 나를 다 알 수 없다. 내 안에 무엇이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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