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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헌 Apr 21. 2022

부활에 질문하다!

안 죽고 영원이 사는 것만이 진정 부활인가?

 옛날 꽃 대궐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임금님이 궁중에서 년 초에 신하들을 모아 놓고 어떤 꽃씨를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대신들! 이 씨앗은 아주 특별한 씨앗이오! 이 씨앗은 심고 가꾸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꽃이 잘 피고 안 피기도 하는 신기한 씨앗이요. 각자들 집으로 가져가서 정성껏 심고 잘 가꾸어 짐이 정해 주는 날에 자신들이 심고 키운 화분을 내 앞으로 가져와 보이시오."


이윽고 정한 날,

대신들은 각자가 정성 것 키운 꽃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온다.

다들 얼마나 꽃들을 화려하게 잘 키웠는지 금방 궁중이 꽃 대궐처럼 되었다.

그러데 한 신하는 빈 화분을 들고 왔다. 그 신하는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전하! 주신 씨앗을 정성껏 심고, 아무리 돌봐주어도 꽃은 고사하고 싹조차 트지 않았사오니... 소인은 죄인이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임금님은 자세를 다시 가다듬고 대신들을 바라보며

“모든 대신들은 다 들으시오! 이전에 내가 경들에게 준 씨앗들은 볶아서 준 죽은 씨앗이요.

허니, 이 사람처럼 싹도 안 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그런데, 경들은 무순 재주로 이처럼 화려한 꽃들을 피워 온 것이요?”라고 하였다.

   

성경은 장차 몸이 부활하는 날에도 꽃 대궐 이야기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경고하고 있다.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그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다 네게서 떠나가라.”

(마 7:23) 


부활을 오해하면 문제가 현생과 내생에 모두 발생하게 된다.

신천지도 부활 생명, 곧 영생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 한국 교회에는 물론 국가사회에 까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부활의 소망은 성경에는 없는 것이다.  

그럼 부활에 대하여 주로 어떠한 오해가 발생하게 되는가?  



 은하철도 999와 부활에 대한 큰 오해

  은하철도 999는 일본인 작가가 쓴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이다.

내용은 철이라는 소년이 사랑하는 엄마의 소원을 위해 은하철도 999를 타고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 우주를 여행하는 스토리이다. 약간 못생긴 듯한 주인공 철이가 메탈이라는 우수에 찬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닌 묘령의 여인과 함께 은하 철도여행을 하는 것으로 흥미롭게 전개해 간다.


은하철도 999가 정차하는 정거장은 우주의 별들이다.

정차할 때마다 그 별에서 벌어지는 우주 공상과학적 스토리는 독자들을 빠져 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은하철도 999가 국제적인 작품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 그 이상의 것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가 마츠모토는 은하철도 999라는 작품에 세계인에게 어떤 깊은 의미와 공감을 주는 내용을 담아 놓았다.


철이가 은하철도 999를 타고 머나먼 우주로 떠나는 이유는

엄마가 죽으면서 아들인 철이 에게 "너는 나처럼 죽지 말고 영생을 받아서 살거라"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철이는 천신만고 끝에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안드로메다라는 별에 도착한다.

하지만 철이는 안드로메다에서 주는 영생을 거부한다.

그리고 발길을 돌이켜 다시 지구로 되돌아가기 위해 지구 행 은하철도 999를 다시 탄다.


철이는 왜 영생을 거부했을까?

  철이가 도착한 안드로메다에서 주는 영생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철이가 안드로메다에서 보고 확인한 "영생"은 인간의 육체를 유리관 속에 시체로 보관하고,

자신의 기억과 의식만을 로봇에 집어넣어서 인조인간이 되어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 단지 죽지 않고 목숨만 연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철이는 무의미함을 느끼고 다시 은하철도 999는 타고 지구로 되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은하철도 999는 “종교가 추구하는 영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깊은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이 단지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부활이 이런 것이라면,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실망하고 거부했던 영생과도 다른 바 없고, 불 노초를 찾던 진시황의 욕심과도 다를 바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단지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이 결코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몸의 부활은 모든 사람이 다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을 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놀라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

  

성경에서 보여주는 부활의 단지 안 죽고 영원히 목숨 연장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인간 영혼은 불멸이며, 장차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든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부활을 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심판의 부활이냐? 생명의 부활이냐?이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몸이 부활하는 날에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영생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전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각장을 통해서 부활 생명인 "영생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통해 다각도로 설명하여 주고 있는 특성을 가진 책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도 기독교의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사람들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깊이 있게 담아내는 유명 고전이다.


요한 사도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영생을 가진 사람들을 “선한 일을 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29)라는 표현 하며 기독교의 부활은 선한 행실과 결부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바울 사도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선한 행위가 기독교인의 존재 목적이 되고 있음을 밝히며, 성경적 부활은 선한 행위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한 행위는 진실함과 맞물려 있다.  

꽃 대궐을 만든 대신들의 행위들이 선하지 못한 이유는 진실함이 없다는 데 있다.

교회에서 자주 쓰는  "아멘"의 뜻은 "진실로"이며,

"거듭남"(요 3:3)은 선한 양심으로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적 부활은 진실과 선한 일을 기뻐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고전 13:6)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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