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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헌 Mar 14. 2022

별에서 온 그대?

창세 이야기 # 2

   “별에서 온 그대”

는 SBS 방송의 2013년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이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게도 제목이 생소하지 않은 것은 보니 시청률도 제법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요즘 현대인들에게 "인간이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으면 “인간은 별에서 왔다.” 대답이 상식처럼 되어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큰 계기는 1980년대에 천재 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 때문이다. 책이 나오기 전에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세계인들이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뒤에 책으로도 출판이 되어 현대인들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래 글은 <코스모스>에 있는 내용으로 지금까지도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는 글귀이다.      


“이 세계는 더 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포장된 사후 세계 이야기로 나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 서서 죽음을 똑바로 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며 사는 것이 낫다."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그대와 함께 보낼 수 있음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우리는 모두 코스모스의 일부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이다.” 는 표현은 135억 년 전에 빅뱅으로 인한 우주의 별들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45억 년 전에 우주에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하고 분해한 원소들이 날아와 지구가 형성되었다. 그 후 지구에서 생겨난 사람도 별들에서 온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인간은 별에서 온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현대 과학자들의 일반적 이론이며 “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 제목에서도 일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신 부재 증명 vs 신 존재 증명

   이처럼 현대인은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칼 세이건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창조한 신의 존재가 증거가 없고 증명도 안 되기 때문에 못 믿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다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창조주가 없다는 것도 증명이 확실히 되어야 신이 없다는 말이 온전히 타당해진다. 그러나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와 나아가 인간의 영혼 속까지도 다 뒤져서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그 이전에 영혼의 세계가 없다는 것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신의 부재에 대한 증거나 증명도 역시 없는 것이다.


물론, 신의 존재 입증도 쉽지는 않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는 단서들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우주 만물의 질서와 생명체의 신비와 경이로움, 또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과 자유, 자의식(自意識 self-awareness)과 신의식(神意識, Sensus divinitatis) 등에서 신적 존재의 단서들을 발견한다. 때론 경험적으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신이 없다는 증명보다 신 존재 증명의 단서가 더 타당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유일한 인간인가?

   기독교 안에서도 창세기 2장에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대한 시각이 다양하다. 1장과 2장의 창조가 각기 다른 인류의 창조라는 해석도 있다. 1장은 고대 인류의 창조이고, 2장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현 인류의 조상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유신 진화론도 이러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유신 진화론은 그 안에서 의견이 다양하지만 현대 물리학과 진화론을 성경의 창조 역사로 수용해 보려는 입장이다.


대체로 전통적인 교회들은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1장, 2장 모두 동일한 인류 아담과 하와의 창조 사건이라고 본다. 2장의 사람 창조는 1장의 천지 창조의 꽃인 사람 창조를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만약 아담을 첫 사람으로 보지 않으면 인간의 원죄, 그리스도의 대속 등 성경의 핵심 메시지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된다. 우리는 성경 전체 맥락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에 대한 깊은 고민과 신중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해석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다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증오감을 가지게 되는 것도 더욱 경계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중요하다. 하지만 타인을 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는 것은 성경의 근본 메시지를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 속담에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칼레파 타 칼라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는 말이 있는 이유이다. 여기서 "아름다운 것"은 진선미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성경을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바울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고전 13:9)라고 말했다. “무지 보다 잘못된 확신이 더 큰 비극을 낳는다."는 말처럼 우리가 아는 것이 유일하다는 독단적 태도가 악의 경로가 되어 수많은 오류와 역사적 비극에서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우리 인생들은 모두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분별과 함께 지속적인 배움의 자세가 필요하다. 배우기 위해서는 겸허한 태도로 경청해야 한다. 사람은 인식의 넓이와 깊이를 더 할 때에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상대주의의 한계도 알면서 절대주의의 독단에 빠지지 않는 길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성경적인 삶의  중요한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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